지난주에 ‘민화, 현대를 만나다-조선시대 꽃그림’전시(갤러리현대)에 가서 놀라운 조형미를 두르고 있는 민화들을 감동적으로 보고 왔다. 곧이어 20여년을 최고의 민화 수집에 헌신해 온 김세종의 컬렉션 전시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릴 예정이기도 하다. 이 전시에 출품될 작품들은 그야말로 민화가 지닌 최고 수준의 회화성을 엄선해놓은 것이라 다들 경이롭게 볼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이러한 전시와 더불어 최근에 부쩍 민화 관련 아카데미를 비롯해 무수한 민화 모임 등 민화를 배우고자 하는 인구가 늘고 있고, 민화 잡지를 비롯해 이와 연관된 시장도 커졌다. 또 그만큼 민화를 재연하는, 응용하고 있다는 수많은 작품들을 빈번하게 접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작업들의 상당수는 흡사 공들여 칠해놓은 색칠하기 도안(컬러링 북)과도 같다는 인상이다. 그것은 조선시대 민화와는 하등 관련이 없는 그림이다. 그저 경직된 선에 가둔 도상들을 균질하고 불투명하게 칠해버린 색칠그림에 불과하거나 이미 있는 민화를 조악하게 흉내낸 것들이 대부분이다.
창백하고 기계적이며 생명력 없는 틀·본을 솜씨 없이 따라 그리면서 민화를 왜곡하고 있거나 민화 본연의 활력적인 그림을 죽여 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얘기다. 따라서 민화를 계승한다는 많은 민화 관련 그룹이나 아카데미 회원들의 그림은 솔직히 말해 민화의 뛰어난 회화성이나 대상을 보는 천진하고 놀라운 시선과 마음, 그것의 빼어난 조형화 능력과는 거의 무관하게 작동되고 있다고 보인다. 오히려 민화의 회화성과 참다운 맛을 다분히 굴절시키고 있다는 인상을 줄 뿐이다. 나아가 그저 민화를 빌려 이에 기생해나가는 시장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아울러 그러한 시장에 빌붙어 사는 무수한 미술관계자들, 자칭 민화 전문가들만이 버글거리고 있다.
민화란 특정한 이야기를 도상화시킨, 읽는 그림이다. 민화에 그려진 무수한 도상들은 저마다 의미를 지닌 상징체계들이라 그 의미를 알지 못하면 본래 그 그림에 대한 온전한 감상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도상을 알지 못해도 그림 자체를 즐기는 데는 어려움이 있을 수 없다. 이미 민화는 회화로서 충분히 돌올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민화가 지닌 풍부하고 놀라운 회화의 맛을 그 자체로 음미하는 데 인색하거나 그 조형미를 미처 깨닫지 못했다고 본다. 그러니 새롭게 추구해나갈 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알다시피 전통시대에 만들어진 모든 이미지는 한결같이 주술적인 도상들이고 텍스트에 기생하는 이미지들이었다. 현대에 들어와 텍스트에서 해방된 이미지는 이제 순수한 감상을 위한 시각적 이미지, 이른바 ‘미술’(ART)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민화를 뜻 그림, 이야기 그림으로 보는 동시에 순수한 그림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니 민화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술인 동시에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는 상징체이기도 하다. 아마도 민화를 그렸던 당시 사람들은 분명 민화를 오늘날과 같은 차원에서 하나의 미술작품, 회화로서의 미학적인 기준에 의해 판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상생활에서의 실제적인 필요에 따라 그려진 생활화를 반복해서 그리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개성적이고 해학적이며 불가사의한 조형의 힘이 불현듯 배어 나왔을 것이다. 더불어 민중의 집단적 소망, 이상을 담아 그리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민화인지라 기법은 되풀이되고 불가피하게 상투적 양식을 보이지만 그 안에서도 저마다 그린 이의 개성과 솜씨에 따른 묘한 편차를 발생시키면서 이질성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또한 민화의 묘미다.
바로 그러한 놀라운 차이를 찾아내야 하며 뛰어난, 개성적인 화가를 재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기존 민화 연구는 이러한 조형성, 회화적 묘미와 특질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고 대부분 그 도상의 의미와 상징체계만을 반복해서 거론해왔다. 민화는 도상이기 이전에 이미 그것 자체로 충분한 회화, 그것도 탁월하고 유례를 찾기 힘든, 특별한 요소들을 지닌 회화임을 거듭 상기해 보아야 한다. 한국인 특유의 창조력과 상상력의 저장소, 회화적 매력을 거느리고 있는 민화, 그것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해보려는 노력 대신에 단지 그 도상의 의미만 읊조리거나 외형의 틀만 따와 온갖 색상으로 밋밋하게 칠해버리는 것이 민화라고, 채색화라고 여기는 그 수많은 민화 관련자들의 안목이 무척 아쉬운 것이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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