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TV에선]사극, 허수아비 왕의 시대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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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TV에선]사극, 허수아비 왕의 시대를 말하다

사극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비춘다. 같은 시대나 주제를 다루는 사극들이 특정한 시기에 쏟아져 나온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당대의 사회상황과 긴밀한 관련을 지닌다. 예컨대 노무현 정부 말기의 정조 사극 열풍이 그렇다. KBS <한성별곡-정>, MBC <이산>, 채널CGV <정조 암살 미스터리 8일> 같은 작품들은 모두 개혁군주 정조의 고뇌와 갈등에 노무현 정부 개혁의 좌절을 투영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 유행한 인조 사극들도 마찬가지다. SBS <일지매>, MBC <돌아온 일지매>, KBS <추노> <최강칠우> 등 10여편에 달하는 인조 연간 사극 대부분이, 왕의 실정으로 파탄 난 민초의 삶과 혁명의 서사를 그려냈다. 당시 민주노총이 발표한 ‘노동자 경제지표를 통해 본 이명박 정부 4년’ 보고서에도 드러나듯 갈수록 악화된 서민 삶의 질과 그에 대한 사회적 분노가 조선 최악의 왕 중 하나로 꼽히는 인조 시대 사극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KBS2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포스터

 

박근혜 정부 시대 사극에도 두드러지는 특정 경향이 있다. 먼저 임진왜란이 등장하는 선조 연간 사극의 급증이 눈에 띈다. 2000년대 이후 선조 시대를 그린 TV 사극 가운데 2004년작 KBS <불멸의 이순신>을 제외하면, 모두 이 정부 들어 제작된 작품들이다. 2013년작 MBC <구암 허준>에서부터 올해의 KBS <임진왜란 1592>까지 일곱 편에 이른다. TV 사극은 아니어도 이러한 경향의 정점에 있는 영화 <명량>을 포함하면 한층 뚜렷해지는 특징이다. <명량> 신드롬 당시 정부는 박 대통령을 이순신 리더십에 대입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으나, 임진왜란 사극 붐이라는 더 큰 맥락에서 보면 정작 대중들은 조선 최대의 난세이자 망국적 상황과 리더십 부재에서 작금의 어려운 현실을 떠올렸다. 특히 세월호 참사 이후 방영된 <징비록>과 <임진왜란 1592>는 국란을 피해 명나라로 망명까지 시도하는 선조의 도주를 상세하게 묘사하며 무책임한 리더에 대한 분노를 더욱 생생하게 담아내기도 했다.

 

이보다 흥미로운 특징은 이 시기에 유독 섭정의 모티브를 다루는 작품들이 자주 등장했다는 점이다. KBS <장사의 신-객주>와 <조선총잡이>는 흥선대원군 섭정기의 후유증을, MBC <옥중화>와 JTBC <마녀보감>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국정혼란을, KBS <구르미 그린 달빛>은 부왕을 대리청정하게 된 세자의 위기를 그렸다. 심지어 이 섭정은 주술적 성격까지 띤다. <장사의 신-객주>에는 신기로 왕실을 사로잡는 무녀 진령군이, <마녀보감>에는 흑주술로 국정을 농단하는 흑무녀가 존재했다. MBC <야경꾼일지>와 <밤을 걷는 선비> 같은 판타지 사극의 상상력은 더욱 노골적이다. 두 작품은 각각 귀신의 힘을 이용한 악의 주술사와 지하궁에 존재하는 사악한 뱀파이어에게 지배당하는, 말 그대로 ‘헬조선’의 어두운 풍경을 펼쳐 보였다.

 

결국 이 시기 사극의 경향은 한 결론으로 이어진다. 바로 군주로서 능력과 자격을 상실한 허수아비 왕의 시대가 불러온 비극이다. 당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을 넘어서 지금의 시국을 미리 예견한 듯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역사에 현재를 투영할 뿐만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미래까지 가상적으로 구현하는 사극 특유의 상상력이 공적 권력이 애써 은폐해왔던 시대의 모순을 미리 읽어낸 것일 수도 있다.

 

현실의 보이지 않는 이면을 상상하고 재구성하는 이 능력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김선영 | TV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