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TV에선]‘푸른 바다의 전설’, 천송이의 랩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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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TV에선]‘푸른 바다의 전설’, 천송이의 랩이 그립다

이번엔 ‘바다에서 온 그대’다. 3년 전 SBS <별에서 온 그대>로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박지은 작가가 그때의 주역인 배우 전지현과 함께 SBS 수목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이하 <푸른 바다>)로 돌아왔다. <별에서 온 그대>가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에 기록된 미확인 비행물체 목격담을 외계인과 톱스타의 로맨스로 재탄생시켰다면, <푸른 바다>는 조선시대 야담집 <어우야담>에서 모티브를 얻어 신비로운 인어와 꽃미남 사기꾼의 운명적 인연을 그려낸다. 별에서 온 외계인이 바다에서 온 인어로 대체됐을 뿐, 이계의 존재와 인간이 사랑을 나누는 기본 구성은 같다. 작가의 자기복제가 아쉽다는 의견도 여기에서 나온다.

 

더 아쉬운 것은 여주인공 캐릭터의 퇴보다. 같은 배우가 ‘엽기 발랄’한 매력을 발산한다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별에서 온 그대>의 천송이와 <푸른 바다>의 인어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천송이는 모카라테의 ‘모카’와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씨를 헷갈려 할 정도로 ‘무식’했을지언정, 적어도 연예계에서 여배우가 어떻게 소비되는지 예민하게 파악하고 대처한 여성이었다. <푸른 바다> 속 인어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도통 모른다. 툭하면 잡혀가고 길을 잃는 그녀는 심지어 말조차 못한다. 2회 후반부에서 인간의 말을 배우기 전까지 인어의 표현은 의성어가 다였다.

 

배우 이민호와 전지현이 출연하는 SBS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

 

인어의 이러한 모습은 최근 한국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의 퇴행적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가령 문화평론가 이영미는 ‘시대와 여배우’라는 글에서 1990년대 신세대 캐릭터들이 주도하던 여성 인물형의 성장이 외환위기를 만나 여성 현실의 위축과 함께 다시 퇴행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 퇴행의 시대에 급부상한 것이 소위 ‘민폐형 여주’다. 이들의 행동은 대부분 남주인공의 ‘멋진’ 모습을 이끌어내기 위한 동기에 머문다. 다시 말해 ‘민폐형 여주’의 존재 목적은 오로지 남주인공의 매력을 극대화하는 데 있다.

 

<푸른 바다> 속 인어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다만 인간 세상에 처음 나온 존재라는 배경이 그 ‘민폐’에 대한 근거를 제공할 뿐이다. 어린아이의 막대 사탕을 뺏어 먹고 준재의 방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사고를 쳐도 사랑스러워 보일 수 있는 이유다. 더 중요하게는 그녀를 어린아이 대하듯 다루고 보호하는 남주인공의 ‘멋짐’을 극대화하는 효과가 있다. 문제는 배우가 전지현이라는 데서 발생한다. 로맨스 장르로는 흔치 않은 여주인공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주역이며, ‘남초’ 영화계에서 원톱 주연의 위력을 발휘하는 배우다. 이런 배우가 남주인공이 “어떤 거짓말을 해도 그걸 다 믿어버리는 ‘무데뽀’ 붕어대가리”를 연기하는 데서 어쩔 수 없는 괴리감이 느껴진다.

 

이러한 측면에서 전형적인 ‘민폐형 여주’임에도 사랑받은 유일한 사례가 KBS <구르미 그린 달빛>의 홍라온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라온 역시 매 순간 사건을 일으키고 남주인공에게 ‘멍멍이’라고 불리는 미숙한 캐릭터였다. 하지만 그를 연기한 김유정이 아직 아역 배우 이미지를 간직한 청소년 배우였기에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한국 로맨스 드라마가 여주인공을 어느 연령대에 맞춰 그리고 있는가를 입증하는 사례다.

 

<푸른 바다>는 그나마 2회에서 인어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조금 흥미로워졌다. 인어는 하루 만에 독학으로 말을 깨쳤다. 앞으로 그녀는 미숙함을 벗고 천송이처럼 능숙하게 랩까지 구사하며 작품을 장악할 수 있을까.

 

김선영 | TV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