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TV에선]‘잘 먹는 소녀들’과 인권감수성의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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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TV에선]‘잘 먹는 소녀들’과 인권감수성의 실종

가학성과 관음증 논란으로 2회 만에 폐지 결정된 JTBC <잘 먹는 소녀들>을 보면, 프로그램이 시작되자마자 포맷 자체가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방청객은 온통 남자다. 곧 등장할 걸그룹 소녀들의 이름을 외치며 우우 소리를 지르고 있다. 사회자는 먹방 요정들의 대결을 예고하고, 앳된 소녀들은 조금 긴장한 얼굴로 대기실에 앉아 있다. 이윽고 소녀들이 한 명씩 스튜디오에 등장해 자신이 속한 그룹의 곡에 맞춰 짧은 재롱을 펼친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먹는다’. 빨아 먹고 뜯어 먹고 핥아 먹고 슬로모션으로 먹고 아무튼 먹는다. 사회자는 그것을 중계한다. 패널과 방청객은 침을 흘리며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하거나, ‘내가 이걸 왜 보고 있나하는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다. 제작진은 왜 애당초 이 프로그램의 부적절함을 알아채지 못했나?

 

ⓒ JTBC ‘잘먹는소녀들’ 공식 홈페이지

<잘 먹는 소녀들>이 먹방과 소녀를 결합한 도 넘은 푸드 포르노였음은 자명하다. 그러나 이 같은 종류의 선정성은, 유독 이 프로그램에 쏟아진 대중의 비난과 그에 따른 폐지의 호들갑이 차라리 의외로 느껴질 만큼 현재의 TV와 엔터테인먼트 산업 전반에 널리 퍼져 있다. 이를 테면 SBS <삼대천왕>에서 EXID 하니의 먹방을 보는 것과 이 프로그램을 보는 것이 크게 다른 종류의 경험인가? <잘 먹는 소녀들>은 단지 그 가학성관음증을 본격적인 하나의 형식으로 만들고 극대화해 날것으로 드러냈을 뿐이다. 지금까지 TV에 일상적으로 존재하던 포르노’(먹방, 걸그룹, 관찰예능)가 최악의 조합으로 조립된 결과다.

 

그보다 관심이 가는 것은 프로그램이 기획된 과정이다. 이것은 의도된 푸드 포르노였나, 아니면 도덕적 해이의 결과였나. 다시 말해 제작진은 이것을 기획할 때 나이 어린 여성을 성적 대상화한다는 선정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그것을 의도했을까? 아니면 그저 음악 경연 프로그램이 유행이라는데 (그 형식을) ‘먹방으로 풀어보고 싶었다는 안일한 생각이, 방송가 전반에 내면화된 인권불감증과 맞물려 만들어진 미필적 우연일까.

 

지금 한국 TV 전반이 처한 심각한 문제는 선정성으로 치닫는 것이라기보다, 건강한 상식을 공유할 수 있는 지대가 텅 비어 있다는 데 있다. 심증은 자꾸 후자 쪽으로 기운다. 양쪽 다 나쁘지만, 후자 쪽이 내겐 훨씬 더 절망적으로 느껴진다. TV가 결과적으로 어떤 프로그램을 내놓든 자신이 취하는 윤리와 태도를 인지하고 있느냐의 여부는 시청자의 믿음을 얻어내는 데 중요한 요소다. TV라는 생물, 그 안에 그것을 관장하는 누군가는 적절한 가치 기준을 세우고 자신을 컨트롤하고 있을 거라는 믿음. 시청자와의 일종의 암묵적 딜. 정치적 올바름 같은 것은 모르고 가벼움을 추구하는 멍청한 프로그램일지라도, ‘자 우리가 심심한 너희를 위해 이런 천박한 길티 플레저들을 잔뜩 준비했어! 마음 놓고 보렴하는 무대 뒤의 말을 읽어낼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시청자는 상술에 역겨워할지언정 절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TV는 믿음을 잃었다. 인권의식은 인권감수성을 조금이라도 가진 이들이라면 참고 볼 수 없는 수준으로 하향 평준화하고 있으며, 방송가 전체가 몰인권적 가치관에 푹 젖은 판단중지 상태에 빠져 있다. <잘 먹는 소녀들>은 폐지됐지만, 이 프로그램의 문제를 내면화한 많은 예능 프로그램들은 여전히 안방을 차지하고 있다. <잘 먹는 소녀들>은 새로운 포맷으로 돌아오겠다고 밝혔다. 그 포맷이 무엇이든 방송계 전반이 믿음을 회복하지 않는 이상 크게 달라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로사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