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TV에선]로맨스 남주인공, 변해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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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TV에선]로맨스 남주인공, 변해야 산다

 

드라마가 대한민국 남자들 다 망쳐놨어. 뻑 하면 나쁜 놈, 미친놈이야.” 인기리에 방영된 tvN 드라마 <또 오해영>에서 남주인공 박도경(에릭)을 향한 동생의 일갈이다. 중요한 건 대한민국 남자들이란 대목이다. 세간의 오해와 달리 나쁜 남자 판타지의 폐해가 여성이 아닌 남성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이어진 대화는 은연중에 이 폐해를 정확히 드러낸다. “그래도 여자들은 나쁜 놈 좋아한다. 세상에 둘도 없는 나쁜 놈이 나한테 애정을 준다? 그거 여자들 뻑 가게 만든다.” 공교롭게도 이 판타지를 신봉하는 이들은 다 애인이 없고, 그 이유를 자신이 나쁜 남자가 아니어서라고 착각하는 듯하다.

 

tvN 드라마 '또 오해영'에 출연하는 배우 서현진, 에릭. ㅣtvN제공

 

<또 오해영>의 사례처럼 근래 로맨스 드라마에서 가장 흥미로운 현상은 나쁜 남자 판타지의 균열이다. 그동안 로맨스의 남주인공은 차도남’(차가운 도시 남자), ‘까도남’(까칠하고 도도한 남자) 등으로 대표되는 나쁜 남자 스타일을 안이하게 반복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은 이제 여성들에게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당하고 있다. ‘국민 남사친에릭남을 향한 환호가 보여주듯, 예의 바르고 인간미 넘치는 남사친’(남자사람친구) 판타지가 유행하는 배경에도 나쁜 남자 캐릭터의 대안을 찾는 여성들의 심리가 깔려 있다.

 

최근 드라마에서 이런 변화를 뚜렷이 보여준 사례는 tvN응답하라시리즈다. 3부작의 남주인공들은 겉으론 무뚝뚝해 보여도 속은 깊고 따뜻한 경상도 상남자 판타지를 반영해왔다. 그런데 마지막 <응답하라 1988>에서 여주인공과 맺어지는 이는 겉으로 봐도 착하고 따뜻한 남자들이다. 덕선(혜리)어남류’(어차피 남편은 류준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시리즈의 적자처럼 보인 정환이 아니라 시골 할아버지의 바둑대결 요청에도 성실하게 임하는 예의 바른 최택(박보검)과 이어진다. 공식을 깨려는 노력도 있겠지만 보라(류혜영) 역시 착해서 좋다는 이유로 선우(고경표)를 택한 걸 보면 분명 변화가 감지된다.

 

트렌드에 발 빠른 tvN의 올해 드라마들이 대부분 같은 특징을 지닌다. <치즈 인 더 트랩>은 소시오패스처럼 보이는 유정(박해진)을 사랑하게 된 홍설(김고은)의 끊임없는 의심과 갈등을 스릴러처럼 전개하며 나쁜 남자 판타지를 수정했고, <또 오해영>은 폭력적이고 음울한 남자 도경이 죄책감과 후회로 인한 환각을 통해 점차 교정되며 미래를 바꾸는 과정을 그린다.

 

요즘 화제의 드라마 SBS <닥터스>의 인기에도 이런 트렌드가 반영되어 있다. 남주인공 홍지홍(김래원)좋은 사람으로 먼저 설명된다. 어린 제자들에게도, 하숙집 할머니에게도 일관되게 따뜻한 그의 인간미는 주변인에게까지 더 나은 사람이 되고픈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문제 학생 혜정(박신혜)은 그로 인해 다르게 살고 싶다는 욕망을 지니고, 이기적이던 서우(이성경)따뜻한 사람이 되겠다고 고백한다.

 

로맨스는 태생적으로 보수적이면서도 트렌드에 민감한 혁신성을 동시에 지닌 모순적 장르다. ‘차갑지만 내 여자에게만은 따뜻했던나쁜 남자들이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으로 바뀌고 있는 것은 어쩌면 얼굴만 바꾼 또 다른 가부장일지라도 일단 외적 변화는 중요한 진전이다. 이쯤 해서 <또 오해영>의 나머지 명대사를 들려줄 때가 됐다. “나쁜 놈이 왜 멋져. 나쁜 놈은 그냥 나쁜 놈이야. 나쁜 놈은 그냥 나쁜 새끼야.” 로맨스 남주인공도 변해야 산다. 제작진도, 판타지를 오해한 현실 남성들도 함께 변할 때가 됐다.

 

김선영 TV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