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힙합의 민족>(JTBC)이라는 프로그램이 나온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할머니들의 랩 배틀’이란 소재에 누군가는 흥미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진지하게 생각지는 않았다. 실제로 출발은 장난이었다.
송광종 프로듀서는 제작발표회에서 “재미있을 것 같아 장난삼아 얘길 던졌”는데, “후배들도, 국장도 하라고 해서”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누구나 한번쯤 관심을 가질 만한 소재에, 최근 JTBC 예능프로그램이 지향하고 있는 듯한 ‘신구 세대 간 조화’라는 흐름까지 맞아떨어졌으니, 프로그램의 탄생을 위한 조건은 갖춰진 셈이었다.
마침내 뚜껑이 열린 <힙합의 민족>에 노인이나 힙합 음악을 희화화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그들은 진지했다. “무리수”, “힙합이 하다하다 이 지경까지 왔다”는 세간의 우려를 프로그램 안으로 영리하게 끌어들여 시청자를 안심시킨 뒤, ‘나이 든 여성들의 인생 후반기 도전과 열정’이라는 익숙한 주제로 나아갔다. 배우 김영옥, 이경진, 양희경을 비롯해 국악인 김영임 등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이들 각자의 이야기가 힙합과 랩이라는, 그들에게서 가장 멀리있는 형식의 대중예술을 통해 무대 위에서 보여졌다. 프로듀서 래퍼들은 “여긴 트라이브 오브 힙합(Tribe of Hiphop), 즐기는 자에게 감히 누가 돌을,(…)나이 성별 상관없이 모두 건배”라며 그들의 연륜과 인생에 합당한 ‘리스펙트’를 보냈다. 이것이 ‘감동 팔이’나 ‘억지 신구 화합’으로 보이지 않는 까닭은, 랩이라는 장르가 본래 갖고 있는 성격 때문일 것이다. 랩은 일종의 말하는 방식이다.
JTBC 예능 <힙합의 민족>_공식 페이지
각자가 연마한 기술을 들고, 성별·인종·나이·계급에 관계없이 마이크하나를 쥔 채 무대 위에 서서,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그 자리에 모인 이들과 함께 나누는 강력한 자기표현 수단. 랩이 언제나 억눌린 자들, 말할 수 없는 자들에게 입을 열 수 있는 강한 무기가 되어온 것은 그래서다. 말하자면 ‘할미넴’들의 이야기와 랩이라는 형식의 조응은, 낯설지만 온당해 보였다.
‘병맛 프로그램’의 길이 예상됐던 <힙합의 민족>이 재미있어지는 지점은 여기부터다. 이 프로그램은 표면적으로 힙합 음악을 소재로 한 가족 예능 프로그램에 머물지만, 우연히 의외의 방식을 통해 힙합의 맨얼굴을 드러내보이고 있다.
힙합이 단지 많은 이들이(특히 힙합 문화에 익숙지 않은 중장년층이) 가진 선입견처럼 허세와 겉멋, 같잖은 자기 과시, 혹은 ‘속사포 랩’ 등 서커스 같은 기술만이 아니라, 본래 무엇보다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는 꽤 진지하고 실천적인 대중예술이라는 것. 흔히 말하는 ‘스웨그’라는 게 미국 래퍼를 모방하는 비슷비슷한 겉멋이 아니라, 각자가 가진 고유한 멋에서 나온다는 사실. 공연 중 배우 김영옥의 입을 빌려 나온 “얘들아 이게 진짜 힙합이다”라는 가사는 농담이지만, 그게 단지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배우 이용녀는 출연 계기를 묻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요새 젊은 사람들이 이 음악을 좋아한다는데, 왜 좋아할까…그럼 한번 알아볼까 뭔가 있겠지. 또 다른 세계가 있더라고요.”
이쯤 되면 힙합 음악을 놀림거리로 만들 거라는 우려는 충분히 가신 것 같다. 그보단 (과장해 말하면) 힙합이 가진 해방의 잠재력을 새삼 확인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물론 제작진의 의도와 달리 힙합과 ‘젊은이’들의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된 중장년층은 프로그램 참가자들뿐인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이로사 | TV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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