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TV에선]‘공항 가는 길’ 진화하는 불륜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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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TV에선]‘공항 가는 길’ 진화하는 불륜의 사회학

KBS 수목드라마 <공항 가는 길>이 호평받고 있다. 베테랑 승무원 최수아(김하늘)와 건축학과 시간강사 서도우(이상윤)의 사랑을 그린 이 작품은 이른바 ‘불륜드라마’다. 수아와 도우에게는 각자의 가정이 있다. 비난받을 수밖에 없는 기혼남녀의 만남임에도, 드라마는 격조 높은 연출과 섬세한 심리묘사를 통해 아름다운 멜로드라마로 승화시킨다. 이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진화하는 불륜의 사회학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흔히 막장드라마로 인식되는 불륜드라마는 가족이데올로기, 남녀관계, 섹슈얼리티 등의 변화하는 현실을 반영하는 정치사회적 텍스트이기도 하다. 대표적 사례로 김수현 작가는 <청춘의 덫>(1978)에서 기존의 여성 수난기로서 불륜 서사를 여성 복수극으로 다시 썼고, 중산층 신화 만들기가 한창이던 1980년대의 <모래성>(1988)에서는 불륜을 가족이데올로기의 허상을 폭로하는 매개체로 그려냈다.

 

기혼여성을 불륜의 주체로 내세워 변화하는 여성의식을 담아낸 <애인>(1996), 위선적 남성지식인층이 주도하는 공적가부장제의 모순을 폭로하고 전업주부의 조건을 성찰한 <아줌마>(2000)도 불륜드라마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그런가 하면 1999년부터 2014년까지 방영된 <부부클리닉-사랑과 전쟁>은 선정적 불륜 묘사로 ‘막장드라마의 대명사’라 불렸지만 외환위기 이후 가속화된 가족해체의 적나라한 세태보고서 성격도 겸했다.

 

배우 김하늘, 이상윤이 출연하는 KBS2 드라마 '공항가는 길' 포스터.

<공항 가는 길>은 한층 예민한 현실인식으로 한국가족제도의 종말을 알리는 작품이다. 기존의 불륜드라마가 ‘굿와이프’의 반란을 통해 가부장제를 비판했다면, 이 작품은 가족제도 최후의 버팀목으로 남아있던 ‘굿맘’의 위기를 통해 붕괴 직전에 다다른 가족 현실을 드러낸다. 수아의 외도는 남편의 배신이 아니라 모성의 불안에서부터 시작된다. 워킹맘으로서 “백점짜리 엄마, 아내는 못 되어도 나름 85점 정도는 된다고 믿으며 일, 가정 양쪽으로 열심히 살아온” 삶이 30대 후반에 들어서며 통째로 흔들리기 때문이다. 가정에서는 자녀교육에 욕심 많은 남편이 딸의 성적을 위해 심하게 다그치고, 경력단절만은 피하려 했던 직장에서는 은근히 퇴사 압력을 가한다.

 

수아의 상황은 실제 워킹맘들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가령 여성주의 저널 ‘일다’는 최근 ‘돌봄의 세대 전가’라는 제목의 연재기사에서 30대 후반에 찾아오는 워킹맘의 결정적 고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시기는 상위 직급을 두고 경쟁이 치열해지고, 가정에서도 자녀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의 본격적인 경쟁체제로 진입하는 시기다. 교육이 계급재생산 도구로 인식되는 한국사회에서 워킹맘들은 기존의 돌봄노동에 더해 까다로운 교육자 역할까지 떠맡게 되며 직장 내 경쟁에서 도태된다. 30대 후반에 가장 많은 퇴직이 일어나는 이유다.

 

사회안전망을 가족에게 전가하는 한국의 시스템은 그동안 철저하게 여성들의 희생으로 지탱돼 왔다. 하지만 갈수록 악화되는 생존 조건 안에서 여성들의 실존은 이제 극단까지 떠밀려 있다. 겉보기엔 남부러울 것 없는 중산층 가정의 순종적 ‘굿맘’ 수아의 일탈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한 경고다. 아래 세대 여성들이 결혼, 출산 기피 등으로 생존을 모색할 때 끝까지 헌신하던 ‘엄마’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공항 가는 길>은 지금까지 나온 불륜드라마 가운데 가장 어두운 한국 가족보고서로 보인다.

 

김선영 | TV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