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소녀시대'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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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우리에게 '소녀시대'는 무엇인가

이택광 /문화평론가·경희대 교수 (http://wallflower.egloos.com/)


최근 <훗>이라는 ‘컴백앨범’을 발표하면서 다시 돌아온(?) ‘소녀시대’는 이제 명실상부하게 ‘오빠들의 판타지’를 완성한 것처럼 보인다. 
<지지지>와 <Oh!>를 거쳐서 <훗>으로 종결된 이 장정에서 ‘소녀’는 성장해서 ‘여자’가 되었고, 이 과정에서 소녀시대에 대한 관음증적인 섹슈얼리티는 노골적으로 강화되었다. 이 관음증의 실체는 불가능한 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지속시키는 하나의 기제이기도 하다. 





흥미롭게도, 이 판타지의 재생산은 ‘마네킨’에서 ‘본드걸’로 이동하는 수순을 밟으면서 진행되었다. <Oh!>에서 잠시 고등학교 ‘치어걸’로 소녀시대가 재현되긴 했지만, 이 임시방편적 표상은 <훗>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남성적 욕망의 대상을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했다. 
한국의 가요시장에서 뮤직비디오의 역할은 가수의 이미지 구축을 위한 필수품이다. 마치 컴퓨터게임의 동영상처럼 뮤직비디오는 ‘뮤직’을 위한 보조물이라기보다 가수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이상화하는 ‘화장술’로서 작용하는 경향이 다분하다. 

이런 까닭에 소녀시대의 뮤직비디오를 단순한 상업적 치장물로 치부하는 것은 소녀시대를 둘러싼 욕망의 변증법을 이해하는 정확한 방법이 아니라고 하겠다. 

소녀시대의 뮤직비디오를 보는 순간, “소녀시대는 무엇인가?”라는 하나의 질문을 떠올리는 것은 ‘비평가’로서 당연한 일이다. 당대의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코드를 생산하고 있는 대상을 분석하지 않고 견딜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비평가이기를 포기해야하지 않겠는가? 
소녀시대는 원더걸스의 완성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소녀시대는 원더걸스가 열어놓은 길에서 ‘소녀들’에 대한 ‘롤리타 콤플렉스’를 인준해준 중요한 욕망의 대상이었다. 

박진영 사단의 원더걸스는 금기시되었던 십대 소녀에 대한 ‘성인’ 남성의 판타지를 허가해준 계기들을 마련했다. 그러나 정작 이 열매를 딴 것은 소녀시대였다. 
원더걸스는 ‘원조교제’라는 음침한 십대에 대한 성인 남성의 욕망을 위생학적으로 거세해서 새로운 ‘삼촌-오빠들의 판타지’를 낳았다. 이를 통해 40대와 10대 자녀가 원더걸스를 동시에 좋아하는 ‘대중-공통문화’의 형성이 가능해진 것도 주목할 만하다. 
마치 나란히 소파에 앉아서 포르노를 보는 프랑스 부녀의 ‘전설’이 다른 차원에서 현시된 것이다. 노골적으로 어린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강조한 이런 경향은 한국에서 특별하게 나타났다고 보기 어렵다. 이미 십대를 성적 대상으로 포섭하는 전략은 세계적으로 진행되었고, 원더걸스는 이 경향이 한국적 결절점을 형성한 표상이었을 뿐이다. 





이미 영국의 경우 90년대부터 이른바 걸그룹의 진출은 가속화되었고, 스파이스걸스와 아토믹키튼, 그리고 슈가베이브즈처럼 가요시장에서 뚜렷한 ‘여성화’의 현전을 보여주었다. 
이 과정은 신자유주의의 노동유연화 정책을 통한 여성노동력의 사회진출과 무관하지 않다. 이 논의는 복잡하기 때문에 생략할 수밖에 없지만, 이런 ‘물질적 차원’의 변화를 통해 이른바 ‘여성화’가 문화적 코드로 자리 잡았고, 그 정점에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워머나이저>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도, 신자유주의적 논리를 경제개혁의 원칙으로 수용하면서 이런 현상들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적 논리라는 것은 여러 가지 중요한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자기계발의 패러다임’이 주체화에서 중요한 강제로서 작동한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가 없다. 

이런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담론이 대중화하면서, 여전히 가부장적인 저항이 잔존하고 있긴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섹슈얼리티와 젠더의 문제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상황은 급변하고 있다. 20-30대 여성들의 비혼률 증가는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에 불과하다. 
언제부터인가 인터넷에 빈번하게 출몰하는 ‘~녀’는 이런 여성화의 과정에 대한 남성들의 공포를 드러내는 증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때 비난의 표적이었던 된장녀가 실제로 ‘커리어우먼’으로 거듭나는 경로는 부박한 자본주의 문화 탓이라고 보기 어렵다. 생산양식의 차원에서 진행 중인 사회적 관계의 변화가 여기에 숨죽이고 숨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할 것이다. 

이상적 여성이라는 ‘오브제 아’에 대한 동경은 종종 공포로 현신하기도 한다. 그 여성의 욕망이 남성의 판타지를 위반하고 위협할 때, 남성적 주체는 쾌감을 넘어서 불쾌감에 사로잡힌다. 이것이 곧 여성적 주이상스의 힘이다. 여성의 오르가즘은 남성에게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서양의 미술은 쿠르베나 마네 이전까지 여성의 몸을 음모나 근육을 제거한 채 재현하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녀’라는 기표들은 바로 이런 여성적 주이상스에 대한 껄끄러운 정서들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는 ‘쾌락의 평등주의’에 기반을 둔 새로운 공리주의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공리주의는 네그리의 용어법에 따라서 정의할 수 있는 ‘소유의 공화국’(the republic of property)이기도 하다. 
민주화는 곧 공평한 쾌락의 분배를 의미하게 되었다. “네가 즐기는 만큼 나도 즐겨야한다”는 것이 공격적인 쾌락의 평등주의라면, 여기에서 좀 더 윤리적 차원으로 이행한 것이 “내가 즐기는 만큼 너도 즐겨라”라는 이타주의이다. 

연예인은 이런 쾌락주의를 위계화하고 차이를 통해 공동체의 이해관계로 잉여쾌락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특히 연예인 담론이 십대나 이십대 초반의 취향에 집중되어 있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대체로 경제활동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젊은 세대’에게 연예인은 자유로운 욕망의 대상을 제공한다. 2008년 촛불에서 확인되었듯이, 이런 욕망의 대상은 때로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정치화할 수도 있지만, 대개 공동체의 욕망구조에 떠도는 영혼을 고착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원더걸스는 바로 이 욕망의 구조에 ‘안전한 섹슈얼리티’라는 공리주의적 가교를 놓았고, 이 가교를 따라서 소녀시대가 건너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소녀시대는 원더걸스를 계승하긴 했지만, 그대로 답습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소녀시대는 원더걸스의 실험성을 제거하고, ‘소녀’에 대한 남성 판타지의 이중성을 강화했다. 성적 대상으로 금지되어 있는 소녀를 이상적 이미지로 설정함으로써, 남성적 주체가 안전하게 욕망을 투여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십대 걸그룹은 ‘소녀’라는 애매하고 미성숙한 대상에서 ‘동생’이자 ‘조카’이자 ‘딸’이라는 구체적 ‘몫’을 부여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 몫은 공동체의 위계화에 따라 구성되는 것이고, 이 역할에 들어오지 못하는 ‘여성(들)’은 ‘나쁜 여자’로 지목되어서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마련이다. 안전하고 쾌적한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여성은 윤리적으로 나쁜 존재로 평가 받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 쾌락의 구조야말로 라캉이 언급한 ‘궁정 풍 사랑’(courtly love)이다. 이 사랑은 기본적으로 성관계를 배제한 상태에서 작동한다. 사랑의 대상을 숭고의 위치로 가져다 놓음으로써 궁정 풍 사랑은 사랑의 진리를 은폐하면서 드러낸다. ‘성관계가 없다’는 정신분석학적인 명제는 궁정 풍 사랑에서 하나의 구조로서 현신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소녀시대는 결코 노골적인 ‘성적 대상’으로 나타날 수가 없다. 
만일 소녀시대가 구체적 ‘여성’으로 드러난다면, 상황은 복잡해진다. 수많은 ‘오빠들’과 ‘삼촌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아빠들’이 소녀시대의 리얼리즘을 배격하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소녀시대가 ‘현실의 여성’이 되는 순간, 이상적 이미지로 남아 있어야할 궁정 풍 사랑의 숭고 대상은 갑자기 세속화한다. 그 기원은 세속이었으나, 그 세속의 차원을 뛰어넘은 소녀시대는 다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것이다. 

현실의 차원으로 진입하는 순간, 소녀시대는 누군가의 여인으로 ‘폭로’될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가 여기에 숨어 있다. 현실의 여인으로 내려앉는다면, 소녀시대는 특정 남성의 대상으로 지목됨과 동시에 그의 ‘소유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 기이한 상황은 ‘소유의 공화국’에 감춰진 외설적 진실을 노출시킬 수밖에 없다. 당연히 이 진실을 대다수 남성적 주체는 견딜 수가 없다. 이런 리얼리즘의 세계에서 소녀시대는 ‘현실 도피’라는 상상적 이미지의 자리를 내어주고 돌연 상징계의 법을 호출하는 마녀로 도래할 것이다. 최근 ‘국민여동생’ 문근영이 한 연극에서 ‘섹시한 여성’으로 변신했을 때 보여준 껄끄러운 정서들이 이를 증명한다고 하겠다. 

이 현실의 압박을 견딜 수 없다는 점에서 소녀시대는 계속 ‘불가능한 대상’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이 상황이 도착적 욕망의 투여를 만들어낸다. 
대체로 공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강박은 이런 도착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도착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어머니의 팔루스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다. 어머니의 팔루스는 곧 아버지의 법이기도 하다. 따라서 도착적 주체는 아버지의 법을 세우기 위한 ‘투사’로서 자기 자신을 자리매김한다. 물론 이 도착적 주체의 법은 상징계적 법과 맞물려 있지 않다는 점에서 파괴적이다

결과적으로 도착적 주체는 상징질서에 대한 위협이다. 이런 점에서 소녀시대에 대한 남성적 주체의 욕망은 양가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 욕망은 새로운 판타지를 구성하기 위한 정치적 매개이면서 동시에 현실의 질서를 고착시키고 재생산하는 폭력성이기도 하다. 소녀시대에 대한 남성적 주체의 욕망은 실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준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지만, 이 불가능성에 대한 자각이 과잉의 공백으로 출몰할 경우에, ‘소유의 공화국’에 대한 대자적 인식으로 확대될 수가 있을 것이다. 랑시에르의 논리를 빌려서 말한다면, 이 과정이 바로 대중문화라는 윤리의 분배구조를 미학의 차원으로 개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