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 성공 그래프를 그리고 있는 영화 <건축학 개론>(감독 이용주, 주연 한가인·엄태웅)은 남성 듀엣 ‘전람회’의 노래 ‘기억의 습작’을 써서 영화의 감동을 배가시키고 있다. 이 곡은 거의 20년 전인 1994년에 나온 노래다. 언론은 이제 ‘돌아온 과거’의 시대적 중심이 ‘7080’에서 ‘8090’으로 이동했다면서 ‘복고’ 열풍의 분석에 열을 올렸다.
대중음악계에서 복고가 뚜렷하게 포착된 것은 재작년 가을부터 불어닥친 ‘세시봉 콘서트’와 이듬해 벽두를 강타한 <나는 가수다>(나가수) 같은 방송 오디션 프로가 득세하면서부터였다. 세시봉 열풍은 1970년대 초중반 유행한 포크의 재림이었고, 오디션 프로들은 조용필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와 신중현의 ‘미인’ 등 저 옛날의 명곡을 무더기로 다시 소비자의 귀에 붙여주었다.
(경향신문DB)
모였다 하면 ‘소녀시대’와 ‘빅뱅’에 대해 떠들던 사람들이 족히 시차가 30~40년은 나는 옛 노래와 가수로 대화의 메뉴를 갑자기 바꿨으니 복고의 사회적 이슈화가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새천년 들어 오로지 10대 중심의 아이돌 음악이 주류 미디어와 디지털 환경을 점령한 것에 넋을 놓고 있다가 정반대 성향의 복고풍 음악이 대항마로 등장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반기는 양상이다. 한 2년 반은 대중문화의 대세가 레트로(retro), 즉 과거로 되돌아가기였다고 할까.
지금 이 순간도 복고의 행진은 도도하다.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는 ‘슈퍼스타K3’ 출신의 3인조 그룹 ‘버스커버스커’의 히트 레퍼토리 ‘벚꽃 엔딩’과 ‘꽃송이가’는 통기타와 하모니카, 멜로디언과 같은 악기를 써서 한동안 접하기 어려웠던 어쿠스틱 질감을 강조하고 있다. 어쿠스틱은 디지털과 대조되는 개념이다. 버스커버스커 선풍도 당연히 복고와 등식화가 이뤄졌다.
심지어 아이돌 그룹도 복고를 채용했다. 지난해 걸그룹 ‘티아라’는 ‘롤리폴리’를 소개하면서 멤버들이 땡땡이 무늬 블라우스, 맥시 스커트, 스카프 등 1980년대풍 의상을 차려입는 복고풍 패션으로 언론과 누리꾼들의 주목을 받았다.
지난 4.11총선에서 지원유세에 나선 민주통합당 한명숙 대표가 “만약 투표율이 70%를 넘으면 티아라의 ‘롤리폴리’ 춤을 추겠다”고 발언했을 정도로 이 곡은 세대를 아우르는 보편적 인지도를 과시했다.
음악부문의 복고가 성질상 아이돌 그룹의 후크송이나 섹시 군무와 대별되는 것임에도 선두적 아이돌 그룹마저 복고에 기댔다는 것은 이제는 누구 할 것 없이 복고를 마케팅의 필수요소로 활용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하지만 여기에는 뭔가가 숨어있다. 복고는 대체 뭘 지향하는가. 어지럽고 현란한 아이돌의 떼춤과 전자리듬에 정나미가 떨어져서 서정적이고 편안한 왕년의 멜로디 음악으로 돌아가는 건가.
반가움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가 없지 않겠지만 그것보다 복고가 빠르게 연착륙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상보다 변화를 겁내며 익숙한 것,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선호하는 대중의 심리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복고가 판을 치게 되면 결과적으로 새로운 것, 진취적인 것으로 향하려는 대중예술의 경향을 약화시킬 소지가 생겨난다. 뒤로 돌아가는 것은 앞으로 뻗어 가려는 분위기가 가득할 때에 다양성을 꾸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복고가 구세주인 양 떠들어대고 그것만을 찬양하는 모습은 퇴행이 아닐 수 없다. 거기에는 음험한 분리주의도 스멀거린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창의적인 동기를, 실험하고 도발하는 흐름을 격려하고 북돋워 주는 것이다. 이게 아니면 성취와 발전은 없다. 대중적 지평이 여전히 약함에도 인디음악에 주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대중음악은 옛것에 매달리지 않고, 현상을 타파하고 미지의 토양으로 진격하는 아티스트들이 등장하면서 진화의 역사를 써왔다. 신중현이 그랬고, 조용필과 서태지가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