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모|대중문화평론가
서강대 운동장 둘레의 나뭇가지에는 아마도 졸업반 학생이 쓴 듯한 ‘7년째 고교생’이란 현수막이 걸려 있다. 지나가며 쳐다보는 학생들의 표정이 어둡다. 이 여섯자 짧은 글에 고교 3년 지옥에 이어 대학 4년마저 과제, 학점 그리고 스펙 쌓기에 매몰된 현재 대학생들의 씁쓸한 현실이 축약돼 있다. 10대에는 ‘입시’에, 20대에는 ‘입사’에 옥죄인 우리 청춘들의 우울한 초상이 눈에 밟힌다.
이 대학은 축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초대가수 무대를 놓고 학생회와 학생들 간에 갈등을 빚었다. 이름이 생소한 인디밴드를 초청하려는 학생회와 유명 가수 초청을 통해 더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기를 요구하는 일부 학생들 사이의 의견대립이었다. 이러한 대치상황이 근래 갑자기 터진 것은 아니다. 적어도 거대담론이 퇴조하고 음악계에선 아이돌 스타가 출현하기 시작한 1990년대 말부터 지속적으로 불거져왔다.
1998년 한 대학 총학생회가 재학생을 대상으로 ‘대학 축제에서 가장 보고 싶은 가수는 누구인가’라는 설문조사를 했더니 놀랍게도 주인공은 당시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걸그룹 ‘S.E.S’였다. 이전 축제무대에선 방송과 주류 음악계에서 펄펄 나는 인기가수가 오히려 더 소외됐다. 대중적 위상보다는 그 가수의 노래가 대학생들이 갖는 개혁과 변화의 가치에 부합하느냐의 여부가 섭외의 절대조건이었다. 단골은 정태춘, 박은옥, 김광석, 노찾사, 꽃다지, 윤도현, 강산에 등이었다. 인기가수라도 최소한 청춘의 폭발적 이미지를 가져야 대학 축제무대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봄축제를 벌이고 있는 성균관대 학생들이 게임을 하고 있다. ㅣ 출처:경향DB
1990년대 중후반 아이돌 음악산업의 개화에 따른 트렌드의 이동은 ‘대항문화’의 공간인 대학가에도 여지없이 찾아들었다. ‘대중문화’의 급습이었다. 고등학생 때 아이돌에 열광하던 학생들이 막상 대학 캠퍼스에 들어와서는 과거 취향을 들키는 게 두려워 경험도 없는 민중음악, 포크송 가수를 열심히 읊어대는 것은 그래도 과도기였다. 2000년에 만난 한 대학교수는 “뒤풀이 자리에서 학생들이 처음에는 정태춘, 안치환을 들먹이지만 속내를 드러내는 막판이 되면 결국 HOT와 핑클 얘기로 끝나곤 했다”고 털어놓았다.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대학가 축제무대는 방송을 점령한 유명 아이돌 가수들로 판이 바뀌었다. 주류 가수가 축제무대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게 당연한 일이 됐다. 한 대학 축제에 출연한 ‘원더걸스’를 보려다가 관객이 밀쳐 다치는 불상사도 있었다. 어떤 가수가 오느냐가 그 대학의 위세를 재는 척도로까지 부상했다.
당장의 유명 가수를 눈앞에서 보고 싶고 대중가요의 힘이 소수 아닌 다수의 공감에 바탕한다는 점에서 친숙한 주류 인기가수 출연을 바라는 입장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학생 대다수의 의견 배제와 묵살은 곤란하다. 그러나 대학 재학시절은 잘 알려진 것, 당연한 것도 의문시하고 현실을 다르게 때로는 삐딱하게 바라보면서 새로운 가치에 눈을 뜨는 기간이다. 그래서 대학생만의 음악, 대학만의 음악공간이 존재한다.
학생 개개인의 취향 조정을 떠나 이러한 캠퍼스 장르의 고유화는 전체 대중음악의 측면에서도 다양한 토양의 확립에 기여할 수 있다. 1980년대 우리 대중음악이 황금기로 기록되는 데는 민중음악과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대학 공간에서 능동적으로 소화되면서 장르 다양성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1980년대 중반 이후 대학가의 라디오방송이 반(反)상업적인 얼터너티브 록의 산파역할을 하면서 나중 대중음악의 새바람을 몰고 왔다. 1990년대를 강타한 록의 영웅 R.E.M과 너바나는 대학생들이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음악 울타리에 갇혀 대학생활 수년이 지나도록 유사한 음악만을 알고 찾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전체 대중음악의 건강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만약 음악에서도 ‘7년째 고교생’이라면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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