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만난 한 록 밴드의 멤버는 “이번에는 여자들이 좋아하는 달달한 음악을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가 얘기하는 달달한 음악이란 선율과 사운드가 편안하게 귀에 감기는 음악을 가리킨다. 록 밴드 본연의 강력하고 우렁찬 음악보다는 무난하게 잘 들리는 음악이 어쩔 수 없는 이 시대의 추세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확실히 근래 대중음악은 상당부분 연성화, 경량화의 경향을 띠고 있다. 음악이 가벼워지고 있는 것이다. 부드러운 힘 혹은 서정성이란 수식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조금은 야들야들하고 심지어 나약하게 들리는 음악들이 많다.근래 대중문화의 키워드가 되다시피 한 재미에의 민감성도 이러한 대중음악의 경량화에 한몫한다.
여기에는 대중의 호응에 대한 부담감과 압박이 크게 작용한다. 예술분야 쪽 사람들의 말로 ‘떠야’ 존재감을 확보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또한 현재의 다수 대중이 힘차고 야수적인 것보다는 중력이 거세된, 귀엽고 상큼한 스타일을 선호한다는 시각에 바탕하고 있다. 내지르고 아우성치며 포효하는 20대 청춘도 그렇다는 것이다.
분명 일리가 있지만 우려되는 것은 음악가들이 솔직한 자신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당장의 트렌드를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현재의 대중가요가 진정한 자기의 예술적 표현이 아니라 대중의 반응에 기대는 상업적 고려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20대의 뜨거운 심장으로 마구 아우성치고 싶어도 현실이 그렇지 않으니 불가피하게 부드러운 쪽으로 가고 있다고나 할까.
앞서 예를 든 것처럼 강력해야 제 맛인 록 밴드마저 그러니 할 말이 없다. 음악이 아티스트 자신을 담지 못하거나 우선이어야 할 자기만족과 거리를 둔다면 당장의 인기는 가능하나 오랜 생명력은 얻지 못한다. 근래 음악이 장수하기 어렵고 전설이 나올 수 없는 시대라는 일각의 비관이 이에 기초한다.
인디밴드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출처: 경향DB)
더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이러한 흐름이 사회적, 경제적 현실과 너무도 유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자아실현이 아니라 입사에 목을 매고 있을 만큼 차디찬 경제현실은 특히 청춘들에게 가혹하다. 젊음의 분노가 솟아야 할 시점이다. 그러나 펼쳐지고 있는 현실은 분노가 은폐의 수준이 아니라 거의 삭제 수준이다.
서구든 우리든 역사적으로 힘든 시절에는 청춘의 함성과 삿대질을 담은 음악이 등장하곤 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후에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거친 내용의 가사를 취한 힙합 음악이나 펑크 밴드 크라잉 넛의 ‘말달리자’가 말해준다. 만약 젊음한테 지금이 힘든 때라면 다는 아니더라도 비타협적이며 강성 기조의 음악이 일정한 지분을 가져야 할 것이다. 물론 비주류 음악계에서 그런 음악을 발견할 수는 있지만 다수의 무관심으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잔인하게 말해 ‘꼽사리’랄까. 그게 싫어서 애초 헤비한 음악을 하다가 연성의 음악으로 전향한 밴드는 얼마든지 있다.
연성화, 경량화와 함께 묶을 성질의 것인지는 모르지만 ‘여성화’의 경향도 두드러진다. 20대 여성이 문화소비의 주체로 부상하다 보니 여성적인 음악이 각광받을 수밖에 없다는 분석 때문이다. 요사이 인디 음악계에 부드러운 음악이 넘쳐나는 게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밴드가 출연하는 라이브 클럽을 가보면 관객의 3분의 2가 젊은 여성들이다. 오죽하면 일부 인디 음악을 두고 ‘된장녀들을 위한 요들송’이라며 비아냥거렸겠는가.
추세는 거부하기 어렵고 생계는 무시하기 어렵다. 하지만 대중예술은 때로 그러한 압박을 거스르며 앞으로 돌진하는 데서 새로움이 주조된다. 트렌드라는 이름으로 주눅 든 연성화와 경량화는 결국 예술에 가장 중요한 시도와 실험의 분위기를 앗아가 버린다. 아티스트 본연의 실험을 하지 못하니 다채로운 음악이 나올 수 없다. 다시 또 결론은 다양성의 부재로 나온다. 우리 대중음악은 메뉴가 너무 빈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