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모칼럼]댄스음악에 대한 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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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모칼럼]댄스음악에 대한 편견

진모 | 대중음악평론가



1970년대 말 디스코음악 전성기 때 LA 타임스의 유명 저널리스트 로버트 힐번은 디스코 유행에 분통을 터트리듯 신랄하게 휘갈겨 썼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우리들 삶에 신념을 불어넣었고 1960년대 록뮤지션들은 사랑과 고통을 노래했던 반면 디스코는 매춘굴의 밤과 같은 일시적인 전율만을 제공할 뿐이다.” 반복적인 리듬에 의한 음악성 빈약과 과잉 상업성을 이유로 디스코를 혹평한 것이었지만 그의 독설에는 실은 댄스음악에 대한 유서 깊은 편견이 숨어있다.


로버트 힐번이 엘비스 프레슬리에게는 존경을 표하는 위의 글을 쓰기 20년 전인 1950년대 중반에 엘비스가 데뷔했을 당시 미국 기성사회의 반응이 어땠는지 몰랐을 리 없다. 엘비스가 텔레비전에 나와 능란하게 허리 아래를 돌리며 야릇한 춤을 추고 거기에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광경에 어른들은 ‘망할 놈의 세상’이라고 개탄했다. 오클랜드의 한 경찰은 “만약 그가 거리에서 그렇게 몸을 놀려댔더라면 우린 그를 체포했을 것”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가수 앨비스 프레슬리 (출처; 경향DB)



조금 깨졌다고는 하나 아직도 몸을 흔드는 댄스를 방정하지 못하다고 보는 인식은 남아있다. 춤을 자극적 몸놀림이라고 표현하는 데서도 그 일단이 나타난다. 당연히 춤을 내건 댄스음악도 예술성과 품격이 떨어진다는 고정관념에 시달려왔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에 젖어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막 글로벌 센세이션을 몰고 왔을 때 한 방송관계자는 빈정거리는 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곡이 빌보드 2위에 오를 만한 곡이나 됩니까? 솔직히 좀 창피해요. 그저 춤이나 추자는 건데 이런 노래 때문에 마치 한국 대중가요가 온통 댄스음악으로 인식될까봐 걱정되네요.” 


세계를 무대로 뻗어가는 K팝에 박수는커녕 우려와 비판의 시선으로 일관하는 사람들 중에도 비슷한 입장을 피력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 K팝은 왜 모조리 아이돌의 ‘댄스’음악이냐고, 경박하고 천속하지 않느냐고 얼굴을 찌푸린다. 일회성, 단발, 퇴조 등의 표현들에는 댄스음악이 딴 음악들에 비해 유통기한이 짧다는 시각이 깔려있다. 댄스음악에 대한 홀대와 무시가 은연중에 산재해 있는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우리 K팝의 문제는 댄스음악이라서가 아니라 ‘댄스음악밖에 없다’는 점에 있다는 생각이다. 다양성 부재에 대한 비판은 백번이고 동의하지만 행여 댄스음악을 예술적으로 폄하하는 것에 기반한 K팝 불신론은 편견 그 자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대중음악은 기본적으로 놀이이고 그것의 쌍둥이 자매는 바로 춤이다. 위대한 역사가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에서 “춤은 놀이의 구체적이면서 완벽한 형태”라고 했다. 이게 대중음악의 기원이라고 하는 아프리카 음악의 본질, 다름 아닌 리듬이며 그것은 음악과 춤이 동체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댄스음악을 깔보는 것은 곧 대중음악을 무시하는 것이며 나아가 대중을 경멸하는 것이다. 고전음악과 대중음악, 고급과 저급, 진지함과 오락이라는 19세기 중·후반의 근대에 확립된 잔혹한 계급적 분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부르주아적이며 엘리트적인 시각이다. 음악이 대중화, 댄스화하는 것은 쇠퇴하는 문화의 증상이 아니라 평등과 보편화로 향하는 현상이다.


1980년대 중반에 등장해 댄스음악이란 용어를 회자시킨 김완선은 무대를 휘저으며 춤을 췄지만 그가 부른 곡은 신중현, 산울림의 김창훈, 손무현 등 대부분 록 음악가들이 썼다. 워낙 댄스음악이 음악적으로 대우받지 못하자 그 고정관념을 뒤집기 위해 음악성을 인정받는 록에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대중음악이 담론도 존재하지 않았고 어떤 자리에도 낄 수 없었던 거의 30년 전의 까마득한 옛날 일이다. 만약 아직도 댄스나 댄스음악에 대한 그런 선입관이 존재한다면 K팝은 의연하게 설 자리가 없다. 아니 대중음악이 영원히 이해를 얻을 자리가 없는 것이다. ‘강남스타일’의 선풍을 비웃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