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스미디어를 통해 전파되는 대량문화는 시대적 트렌드보다 딱 반 발자국 빠르다. 언뜻 보면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내어 사람들을 이끄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이미 한구석에서 ‘덕후’들이 생산해 놓은 문화를 빌려온 경우가 많다. 반면 언뜻 보면 이미 대세가 된 취향을 뒤늦게 복제하고 반영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아직 그 ‘대세’를 접하지 못한 다중에게 퍼뜨리고 지배적 문화로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대량문화(mass culture)는 대중문화(popular culture)를 주도적으로 구성하는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반영하는 것도 아니다. 둘 다이기도 하고 그 중간이기도 하다.
큰 인기를 모았던 대부분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은 ‘반 발자국’의 공식을 충실하게 따랐다. 물밑에서는 분명히 거대한 크기로 존재하지만 수면 위로는 삐죽하게 귀퉁이만 드러낸 시대적 경향을 낚아채서 가시화시킨다. tvN의 ‘응답하라’ 시리즈 역시 그런 역할을 해왔다.
여러 군소 케이블 채널 중 하나로 보였던 tvN이 지상파 3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예능의 강자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응답하라’ 시리즈는 큰 역할을 했다. 2012년의 <응답하라 1997>은 시청률 1%만 넘어도 성공이라던 당시 케이블 채널의 한계를 비웃으며 최고 9.4%까지 찍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이듬해의 <응답하라 1994>는 중반 이후부터 꾸준하게 시청률 두 자릿수를 기록하면서 동시간대 지상파 프로그램들과 ‘맞짱’을 떴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시작한 시리즈 세 번째 작품 <응답하라 1988> 역시 아직 반환점도 돌지 않았지만 전작 <응4>의 시청률을 넘는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런데 <응8>의 인기에는 다소 의아한 구석이 있다. 3년 전의 <응7>은 분명히 반 발자국 앞서 나갔다. 미래에 대한 기대보다 과거에 대한 향수가 더 절절해지기 시작할 때, 이 틈을 비집고 <응7>은 ‘복고’ 트렌드를 대중문화의 키워드로 자리잡게 만들었다. 영화 <써니>와 <건축학개론>, 예능 프로그램인 <나는 가수다>도 이 트렌드를 함께 견인했다.
<응4>가 방영된 재작년은 아마도 ‘복고’ 트렌드가 수면 위의 주도적 현상으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시기로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응8>은 반 발자국 앞서 나가기보다는 반 발자국 뒤처진 드라마이다. 전작의 문법들을 아주 충실하게 따르기 때문에 ‘익숙함’의 미덕을 선사할지언정 ‘신선함’이라는 자극도 덜하다. 그런데 왜 시청자들은 계속 충성스럽게 복고에 ‘응답’하는가?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_경향DB
어쩌면 지금 시청자들은 복고에 응답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응8>이 방영되는 지금, 과거는 더 이상 과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3년 전 복고풍의 대중문화가 각광을 받을 때, 많은 학자들은 사회적 신뢰감의 하락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의 증대로 인해 사람들이 안락했던 과거에서 위안을 찾으려 한다고 해석했다. 옳은 해석이지만, 지금껏 유효할 리는 없다. 3년 전에는 미래의 부재가 과거를 소환했으나, 지금은 현실 자체가 과거를 향해 역주행하고 있다. “그때가 좋았지”가 아니라 “그때도 그랬지”가 되어버렸다.
물론 <응8>은 여전히 ‘좋았던 옛 시절’을 재현하며 향수를 포장한다. <응7>이나 <응4>와 다르지 않다. 악역은 등장하지 않으며, 우정은 진하고, 쌍문동 골목길은 푸근한 대리가족의 놀이터이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고, 노력하지 않아도 흉보는 이들은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응8>의 과거는 자꾸 현재와 겹쳐진다. 올림픽 피켓걸의 고단함은 추위에 떨던 국가장의 어린이 합창단과 겹쳐지고, 서울대 여학생의 반독재 시위는 광화문의 차벽과 겹쳐진다. 우리의 지금이 30년 전과 무엇이 다른지 자꾸 묻는 것 같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은 군사독재 시절과 다르지 않고, 개선되기는커녕 악화되기만 하는 여성 혐오, 지역차별, 부와 지위의 세습은 조선시대 부럽지 않다. ‘헬’조선이라는 어색한 조어가 폐부까지 와닿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헬조선이라는 말을 민족적 자부심 없는 유약한 젊은이들의 푸념으로 이해하는 소위 ‘K저씨’들의 존재 또한 지금의 우리 사회가 정녕 21세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얼마 전 정권이 바뀌며 캐나다의 새로운 리더로 등장한 트뤼도 총리는 왜 각료의 성비를 5 대 5로 했는지, 왜 굳이 장애인과 이민자, 원주민을 망라하여 내각을 구성했는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명쾌한 답을 던졌다. “2015년이니까!” 맞다. 우리는 지금이 2015년임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는 <응8>의 성공을 설명할 수 없다.
이 드라마는 안락했던 환상 속의 과거가 아니라 혼란스러운 현재의 거울이다. 드라마는 1988년을 부르며 응답하라고 외치는데, 시청자들은 자꾸 그 안에서 오늘을 본다. 우리는 어쩌다가 1988과 2015를 헷갈리게 된 걸까?
윤태진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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