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채로운 주제들을 명징하고 혜안이 깃든 사유로 혹은 유려한 비평의 언어로 풀어내던 그의 글쓰기를 좋아했던 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그가 엮어낸 책을 읽어가며, 텍스트 속의 내용들 못지않게 ‘말들의 풍경’이라는 제목과 표현이 마음속에 각인되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찻집이나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접하는 사적인 대화나 온라인상에 등장하는 논의들과 공방들 속에서, 그리고 공적으로 발화되며 언론이 매개하는 정치인들이나 공인들의 담화 속에서 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이 혹은 지식인과 지식기사들이 펼쳐내는 다기한 말들의 면모와 초상을 대면할 수 있다.
동시에 이 표현법은, 단순한 수사적 쓰임새를 넘어, 우리가 종종 당연시하는 언어의 역할과 대립과 각축상 그리고 언어를 매개로 한 의미작용이나 소통과 불통의 함의들을 다면적으로 돌아보게 해주고, 우리가 처한 사회정치적인 맥락 속으로의 구체적인 복기의 문제를 곱씹게도 해준다.
그런데 작금의 한국 사회 내 공적인 영역이라 할 만한 공간이나 중요한 사회정치적 상황 속에서 발현되는 말들의 풍경은 매우 경색되고, 사실성과 진실의 측면에서도 지극히 초라하다. 나아가 발화자 자신의 진중한 자기성찰도 종종 휘발된 채 이루어진다.
여전히 심대한 갈등과 이견을 생성하고 있는 국정교과서 문제가 전개되는 국면에서, 대통령은 “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 혼이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이고,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요지의 생경하고 공감하기 쉽지 않은 주장을 펼치면서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
황교안 국무총리가 3일 오전 정부 서울청사에서 한국사 교과서 국정 확정 고시를 하고 역사교육 정상화를 주제로 <국민께 드리는 말씀>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다._경향DB
또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확정고시 회견에서 총리는 “전국에 2300여개의 고등학교가 있는데 그 중 세 학교만 교학사 교과서를 선택했고, 나머지 99.9%가 편향성 논란이 있는 교과서를 선택했다”고 지적하면서, “더 이상 왜곡되고 편향된 역사교과서로 우리의 소중한 아이들을 가르칠 수는 없다”는 궁색하고 설득력이 매우 떨어지는 입장을 강변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국정교과서를 반대하면 ‘비국민’이라는 매우 경직되고 과잉을 넘어 위험하고 몽상적이기까지 한 표현에서, “지금 대한민국의 국사학자들은 90%가 좌파로 전환되어 있다”는 실로 ‘대범한’ 강변과 사실성이 현저하게 결여된 일방통행식의 궤변들이 공적 공간을 유령처럼 떠돌고, 흔들고도 있다.
이쯤 되면 공적인 언어와 발화의 품격과 역할이 어떤 지경에 이르렀으며, 상대를 고려하는 소통이나 진정성을 개진하는 대화와는 얼마나 거리가 먼지를 시간을 두고 분석할 필요도 없을 만큼, 우리가 대면하는 말들의 풍경은 어그러지고, 퇴행하고 있다.
그것은 정치권력의 이해관계에 충실하게 복무하며 과잉된 가치에 의해 도구로 화한 ‘감염된 언어’가 빚어내는 불온하고 경사진 정경이기도 하다. 안타깝고 회한이 밀려들지만, 현재로선 공론과 정론이 정치권력과 관료들의 발화와 담론 속에서 숙고될 가능성은 매우 작아 보인다.
강단의 교육자로서 아이들에게 현재 난무하며 거리낌 없이 내던져지는 앞서 언급한 유형의 거친 말들과 의도된 ‘프레임 작용’을 어떻게 풀어주어야 할지, 밀려드는 곤혹감과 더불어 부끄러움과 심란한 느낌 또한 절감하게 된다.
얼마 전 2008년의 촛불집회 이후 광장에 처음 등장한 대규모 시위와 관련해 보수언론은 ‘불법’ ‘도심 난동’ ‘폭력’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면서, ‘차벽’의 위헌성과 ‘불통’ 그리고 ‘과잉진압’의 문제는 비켜가는 관성을 보인 바 있다.
칠순에 가까운 한 농민이 물대포의 직사를 받고 사경을 헤매는 상황에 관해 ‘공영’ 방송은 외면하고 시위대의 ‘주장’으로 처리하는 또 다른 문제적인 관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국 현대사의 격랑과 아픔을 체화하는 그 분의 따님 이름이 ‘백민주화’임을 알게 되고, 그녀가 신입생 때 수업에서 만났던 학생이었음을, 그리고 그 이름 속에 어떤 염원이 깃들어 있었는지의 기억을 반추하게 된 것은 며칠 전의 일이다.
훗날 제대로 된 교과서가 나오게 된다면, 이 시대 불온하고 일그러진 말들의 풍경 속에 실종되고 배제된 진실과 역사적 진정성을 준엄하게 짚어내고 되찾아 줄 것이다.
이기형 | 경희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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