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우경화가 심화되는 가운데 지난여름 개봉한 영화 <암살>의 흥행은 더 의미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다룬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사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은 대사는 안윤옥의 대사였다. 하와이피스톨이 “두 사람을 죽인다고 독립이 되느냐”고 묻자, 안윤옥은 대답한다. “그렇지만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하지만 안윤옥의 바람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광복 70주년을 맞은 지금까지도 전쟁을 일으킨 일본에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지 못했고, 친일 행위에 대한 책임 또한 묻지 못했다. 광복 이후 우리 사회는 정의를 구현하기보다 경제성장이라는 성공과 이익에만 몰두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가 바로 MBC <무한도전>의 하시마섬과 우토로 마을 방문 편이다.
일제강점기, 전쟁에 필요한 석탄을 캐기 위해 한국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강제징용돼 노역과 배고픔으로 죽어간 하시마섬이 현재는 유네스코 유산으로 등재됐다는 충격적인 사실, 강제노역으로 끌려간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우토로 마을의 열악한 상황, 그들의 슬픔을 통해 우리가 잊고 지냈던 고통이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뒤늦게 마주한 출연자들의 눈물은 곧 우리의 모습이기도 했다.
전쟁 피해자의 상처를 보듬고,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려는 노력은 다큐멘터리 <그리고 싶은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다큐멘터리는 2007년 한국, 일본, 중국의 3개국 작가들이 모여 자신이 생각하는 ‘평화’를 그림책으로 만들어 동시에 출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한국의 그림책 작가 권윤덕은 위안부 피해 여성 심달연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일본군 위안부’의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든다. 작가는 13세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할머니의 삶을 통해 함께 슬퍼하고 위로하면서 전쟁의 참혹함을 깨닫게 되고, 이를 그림책으로 출간하게 된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바라보는 작가의 진정성은 현재 많은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지음.
경제성장이라는 목표에 가려졌던 과거의 아픔들이 다양하게 재조명되고 있는 가운데, 2013년 출간된 <제국의 위안부>가 논쟁적 담론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의 저자인 박유하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는 이유를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만 위안부 피해자를 재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한국에서 위안부는 ‘가녀린 소녀’거나 노구를 이끌고 투쟁하는 ‘투사’의 모습으로만 재현된다는 것이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주도해온 위안부 담론이 위안부와 관련한 다양한 시각을 접할 수 없게 만들었다며, 자신이 사명감을 가지고 이 책을 출간했음을 이야기한다. 일본과의 화해가 아시아 통합으로 연결됨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피해자 담론으로 인해 우리 사회에서 꼭 필요한 일본과의 화해가 방해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 조금만 깊게 생각해봤다면, <제국의 위안부>와 같은 책은 출간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쟁터로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해야만 했던 피해 여성들이 자신의 고통을 설명할 수 있는 모습은 ‘가녀린 소녀’거나 노구를 이끌고 투쟁하는 ‘투사’일 뿐이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책에서 ‘위안부’가 아닌 ‘제국’만을 보고 있다. 결국 <제국의 위안부>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로부터 고소당하고, 검찰이 박 교수를 불구속 기소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연구자의 저작에 대해 법정에서 형사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단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학자들의 성명서가 발표되면서, 논쟁적 담론은 더 확산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담론은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너무 원론적인 논의다. 아직 위안부 피해자가 살아있고, 일본으로부터 공식적인
사과도 받지 못한 상황이어서 학문과 표현의 자유라는 입장에서만 위안부 피해자의 문제를 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으로 나치에 고통을 받았던 유럽 국가들은 나치 전범을 처벌하기 위해 공소시효를 없애면서 반세기가 지난 오늘까지도 전범들을 잡는 데 노력하고 있다. 그들에게 학살당하거나 영원히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희생자들을 위해, 지금의 세대에게 범죄자들은 반드시 법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교육시키기 위해 ‘나치 범죄조사중앙본부’는 나치 전범이 100세가 된다고 해도 끝까지 조사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제국의 위안부>가 주장하는 일본과의 화해는 왜 해야 하며, 누구를 위한 화해인 것인가. ‘화해’와 ‘아시아의 통합’을 위해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과 요구를 그만하자는 주장을 이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것인가. 사과와 화해는 사과받아야 할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이다.
이종임 | 고려대 미디어학부 강사
'대중문화 생각꺼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화비평] 이윤석과 장동민 (0) | 2015.12.29 |
---|---|
[문화비평]‘송곳’이 된다는 것 (0) | 2015.12.22 |
응답하지 않는 1988 (0) | 2015.12.01 |
드라마 속 여성들 ‘역변’하는 현실 (0) | 2015.11.27 |
[문화비평] 우리 시대 초라한 ‘말들의 풍경’ (0) | 2015.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