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스캔들' 알고보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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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스캔들' 알고보면 이렇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2010 10/26위클리경향 897호



ㆍ드라마 속 정조시대 공부벌레들 모습 어디까지 사실일까


한국방송 월화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의 시청률은 10%대다.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린 엠넷 「슈퍼스타K 시즌2」가 케이블방송임에도 불구하고 15%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한 것에 비교하면 황금시간대 공중파 드라마로서는 낮은 시청률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성스’라는 약칭으로 불리며 드라마 애호가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팬층을 형성하고 있다. 남장 여자를 둘러싼 로맨스와 정의를 추구하는 유생들의 성장담이 매끄러운 연출을 통해 절묘하게 결합된 덕분이다. 드라마는 정조시대 성균관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실제 성균관과 정조시대 조선의 모습은 어땠을까. 몇 개의 키워드로 살펴보았다. <편집자 주>





△성균관 = 성균관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충렬왕 때다. 그 이전까지 국자감이라 불리던 국립 교육기관의 이름이 이때 성균감으로 바뀌었다. 성균관으로 개칭한 것은 공민왕 때다. 
조선 건국 후인 태조 6년, 성균관은 개성에서 지금의 서울 명륜동 일대 숭교방으로 이전한다. 정종 2년(1400년)에는 화재로 한 차례 소실됐으나 1409년 원상복원됐다. 성균관의 교육이념은 단 하나, 유교적 소양을 갖춘 국가 엘리트 양성이었다. 
드라마에서 정약용(안내상)이 유생들에게 힘주어 말하듯 “그대들은 나라의 녹을 먹는 성균관 유생”이었던 것이다.

△동재와 서재 = 조선시대 성균관은 기숙학교로, 기숙사는 청재라 불렀다. 청재는 명륜당을 기준으로 왼쪽의 동재와 오른쪽의 서재로 갈렸다. 동재와 서재에는 각각 28개의 방이 있었다. 청재에는 온돌이 없어 겨울에는 화로 없이는 버티기 힘들었는데, 이 때문에 성균관 유생들 중에는 하숙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서재는 노론의 자제들이 사용했고, 동재에는 소론 및 기타 당파의 자제들이 머물렀다. 상재생들의 경우 한 방에 보통 2~4명이 기거했지만, 하재생들은 10여명이 같이 사용했다. 상재생과 하재생이 같은 방을 쓰는 것은 금지됐다.
따라서
드라마에서 동재와 서재의 유생들이 서로 편을 갈라 힘겨루기를 하는 모습은 사실과 일치하지만, 남인 김윤식(박민영)과 노론 이선준(박유천)이 소론 문재신(유아인)과 한 방을 쓰는 것은 100% 허구다.

△수업 = 드라마에서는 유생들이 공부하는 모습보다 술을 마시거나 음모를 꾸미는 데 열중하는 모습이 더 자주 비친다. 
물론 재미를 위한 장치일 뿐, 실제 성균관 수업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성균관의 시험은 크게 강경과 제술로 나뉘었다. 강경은 경전을 읽고 그 핵심을 파악하는 것, 제술은 강경에서 공부한 바를 토대로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는 것이었다. 
유생들은 모두 9개 교과목을 배웠는데, 한 달 30일을 기준으로 20일은 경서를 공부하고 6일은 제술을 공부했다. 오전에는 교관의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이를 복습했다. 또한 수시로 시험이 치러졌는데, 개중에는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무작위 추첨식 시험도 있었다. 
일고라는 형태의 시험은 날마다 상재와 하재에서 한 명을 무작위로 뽑아 그날 배운 글을 외우게 했다. 순고는 10일에 한 번 보는 시험이었는데, 이는 일종의 작문으로 유생들의 필력을 측정했다. 이외에도 달마다 치르는 월고, 해마다 치르는 연고 등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은 곧 시험의 나날이기도 했다.

△장의 = 드라마에서 하인수(전태수)는 성균관 장의의 권한을 이용해 남장 여자인 주인공 김윤식을 갖가지 방법으로 괴롭힌다. 장의는 일종의 학생회인 자치기구 재회의 우두머리다. 장의는 재회를 소집하거나 유생들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으며, 전임 장의 3명의 추천을 통해 뽑은 뒤 대사성의 인준을 받았다. 
드라마에서 장의가 하인수 한 명뿐인 것은 사실과 다르다. 실제 성균관에는 동재와 서재에 장의가 각기 1명씩, 모두 2명이 있었다.

△순두정강 = 드라마에서 김윤식은 하인수의 음모로 성균관 유생들의 물건을 훔친 범인으로 지목된다. 이에 정조는 순두정강 과제로 진범을 찾아내라는 과제를 주고, 이를 기회로 윤식은 모함에서 벗어난다. 
성균관 유생들은 과거 급제가 최종 목적이었지만 성균관 내에서 여러 종류의 시험을 치러야 했다. 시험은 도기과, 절제, 친시, 응제, 알성시 등등 종류도 다양했는데, 그 중 순두정강은 임금이 주관했다. 
매년 2, 4, 6, 8, 10, 12월의 11일마다 출석부를 임금에게 올리면 임금이 이 중 몇몇을 골라 시험을 보게 했다.

△벽서 = 소론 영수인 대사헌의 아들이자 성균관 유생인 문재신은 밤마다 조선의 실정을 비판하는 붉은 색 벽서(일종의 대자보)를 화살에 묶어 조정 중신들의 집 벽에 쏘고는 달아난다. 이 때문에 그는 홍벽서라는 별명으로 알려지게 되는데, 이는 물론 가공의 인물이다. 
그러나 선조 때 ‘벽서지변’이라 하여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1606년 6월에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문묘에 조정을 비방하는 벽서가 나붙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조정에서는 성균관 관리 몇 사람을 잡아들여 처벌했는데, 실제로는 성균관 유생들의 짓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이보다 앞서 성종 13년에도 성균관 내에 “썩고 용렬한 무리들이 그 벼슬을 차지하였도다”라며 성균관 스승을 비방하는 내용의 벽서가 나붙어 성종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수사에 나서는 등 한바탕 난리가 났는데, 결국 범인은 잡지 못했다.

△반인과 반촌 = 반인은 성균관에서 일하는 노비들로, 반노라고도 불렀다. 반인들은 평생 성균관에 붙어 살았다. 재직 또는 직동이라 불린 반인 남자아이들은 세숫물을 나르거나 술을 타오는 등 유생들의 시중을 들었다.
반인 여자아이들은 성균관 관비가 됐다. 이들은 주로 밥과 반찬을 만들거나 빨래를 담당했다. 수복과 관비가 서로 결혼해 자식을 낳았으므로 이들의 자식 또한 반인이나 관기가 됐다. 
원칙적으로 이들은 죽을 때까지 성균관을 떠날 수 없었다. 반촌은 반인들이 사는 마을이다. 유생들을 상대로 한 하숙집, 시장, 음식점, 푸줏간 등이 있었고, 강력범죄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드라마에서는 홍벽서를 뒤쫓아 온 관군들이 반촌으로 진입하지 못하는데, 실제로도 그랬다. 조선시대에는 반촌에 함부로 들어간 포졸이 처벌받기도 했다.

△정조와 정약용 = 20대부터 40대까지 여성들이 <성균관 스캔들>에 열광하는 것은 꽃미남 배우들의 대거 등장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른 정치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조(조성하)와 정약용 때문이기도 하다. 
정약용은 1783년 과거를 통해 생원이 된 후 처음 정조를 만났다. 정약용은 성균관 학생 시절 정조가 내준 시험 과제에서 독특한 답변으로 정조의 관심을 모았다. 정약용이 정조의 야심적인 화성 건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드라마에서는 성균관 박사 정약용이 화성 축성을 위한 각종 도구의 설계도를 정조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나오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정약용이 성균관에서 유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정조가 정약용에게 화성을 설계하라는 명을 내렸을 때 정약용은 부친상으로 3년간의 여막(천막) 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참고자료: <성균관의 공부벌레들>(이한, 수막새, 2010)
<조선조 성균관 교육과 유생문화>(장재천, 아세아문화사, 2000)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이덕일, 김영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