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사무실에서 직장인들이 둘러모여 커피 내기 사다리 게임을 한다. 여주인공이 특정 브랜드의 카페에 다녀온 뒤 동료들에게 한 잔씩 건네준다. 남자 주인공은 책상 모서리에 상표가 잘 보이게 놓아둔 커피를 가끔씩 천천히 들어올린다. 최근 인기있는 TV 로맨틱코미디 드라마에 나오는 장면이다. 이제는 시청자들에게 친숙한 간접광고, PPL(Product PLacement)이다. 커피뿐 아니라 이 드라마 속의 가구, 휴대전화, 구두, 반지 등도 제작지원 업체들의 제품이다.
인기 예능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출연자들이 퀴즈풀이를 준비할 때는 서서 공부할 수 있는 높이조절 책상, 공부하다 음식을 시켜먹을 때는 스마트폰의 특정 배달 앱이 화면을 채운다. 그 책상은 같은 방송사의 TV 뉴스에서도 소개됐다.
이처럼 광고가 프로그램 밖이 아닌 속으로 들어가는 흐름은 TV 쪽에서는 이미 대세가 됐다. 방영 직후 프로그램과 제품 이름을 합친 상품이 날개돋친 듯 팔린 사례가 허다하다. 한류스타 전지현의 “눈 오는 날엔 치맥인데…”라는 대사 한마디가 중국에 치킨 열풍을 불러일으킨 것은 물론이고 중국 젊은이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꿔놓았다고까지 얘기된다. 제품 광고와 TV 프로그램 콘텐츠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전통 매체인 신문도 이 같은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 특정 업체·제품·기관의 장점만 주로 나열하는 ‘홍보성 기사’가 늘었기 때문이다. 한국신문윤리위원회는 지난 10년간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 홍보성 기사로 제재받은 기사가 2006년 107건에서 2013년 770건으로 7배 이상 늘어났다고 최근 발표했다. 또 연간 제재 건수의 10~20%였던 홍보성 기사가 2009년부터 급증해 40%를 넘어섰다고 덧붙였다.
전통 미디어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요즘의 디지털·모바일 시대에는 광고와 콘텐츠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흐름이 ‘네이티브 광고’로 집약된다. 네이티브 광고는 ‘광고인데 광고 아닌 척하는 광고’다. 온라인 플랫폼에서 정보와 재미를 담은 콘텐츠 형식으로 보여주는 광고다. 예컨대 ‘올가을 놓치지 말아야 할 여행지 5곳’이라는 제목의 기사형 콘텐츠 안에서 특정 여행사의 상품을 광고하는 식이다. 네이티브 광고임을 알리는 ‘협찬’ ‘후원’ 등 표기를 별도로 해놓지만 온라인 이용자는 경험상 콘텐츠로 인식하면서 기존 광고보다 관심을 더 보일 수 있다. 네이티브 광고는 특히 모바일에서 더욱 유효한 것으로 조사되며 뉴미디어 시대의 주요 수익원으로 각광받고 있다. 인터넷 매체인 미국의 버즈피드, 허핑턴포스트가 선도한 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같은 전통 유력 매체도 속속 뛰어들었다.
SBS 주말드라마 <신사의 품격>에 출연하는 배우 김하늘과 김민종이 PPL로 등장한 신경숙의 소설 <모르는 여인들>(위)과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아래)를 보고 있다._경향DB
그러면 네이티브 광고는 디지털 혁신을 꾀하고 있는 전통 미디어들의 ‘살길’일까. 광고와 콘텐츠의 크로스오버는 디지털 시대의 대세일까.
일단 수용자와 미디어의 반응과 입장은 긍정적인 편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지난 5월 네이티브 광고를 본 1000여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다’(70.0%), ‘신뢰할 만하다’(62.8%), ‘재미있다’(55.4%)는 등 호의적인 소감을 밝힌 응답자가 절반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협찬 받았다고 분명히 밝히면 문제없다’는 응답자도 68.5%나 됐다. 광고라는 사실을 속이지만 않는다면 유익하고 재미있는 콘텐츠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얘기다. 또 세계신문협회는 지난 6월 ‘혁신보고서’에서 “지난해 21% 성장한 네이티브 광고는 이제 엄존하는 현실”이라며 “논쟁할 필요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네이티브 광고를 무작정 ‘황금알 낳는 거위’쯤으로 여겨서는 안될 일이다. 광고가 저널리즘 영역까지 넘어올 때 신뢰도가 떨어지는 문제가 따르기 때문이다. 미디어 전략 분석가 던컨 홀은 최근 ‘네이티브 광고가 불러올 수 있는 위기’라는 글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단기적으로 수익을 낼 수 있어도 장기적으로는 눈속임을 계속하는 것이라 신뢰도 하락의 위기를 맞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제아무리 확실히 ‘광고’라 명기해도 상당수의 독자는 광고로 생각하지 않아 나중에 속았다고 느끼면 언론사를 믿지 않게 된다는 얘기다. 그는 이어 “밀레니얼 세대(1980~2004년생)는 역사상 가장 신뢰를 하지 않는 세대로 꼽힌다”면서 “그들의 84%는 광고를 믿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전했다.
가치중립적인 정보와 재미를 담은 광고는 저널리즘의 일부로 인정될 수 있을까. 눈속임을 하지 않는다고 강변하는 것이 정직한 언론사라는 증거가 될까. 정부·기업과 더불어 젊은이들이 불신하는 기관으로 꼽히는 뉴스 미디어가 네이티브 광고라는 최신 트렌드를 따라갈 때 반드시 짚어봐야 할 문제다.
차준철 | 디지털뉴스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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