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IPTV 방송사업자는 해외 제작사와 유명 미드(미국 드라마)를 국내에 독점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하면서 경쟁사들과 콘텐츠 차별화 전략을 펼쳤다. 이 전략을 통해 해당 사업자는 신규 가입자 확보에 성공했다고 한다. 경쟁사들도 뒤따라 해외 블록버스터급 콘텐츠를 독점 공급하는 데 열을 올리면서 해외 콘텐츠 가격은 2배 가까이 껑충 뛰었고 해외 제작사들은 쏠쏠한 재미를 보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번 일을 지켜보는 국내 콘텐츠 사업자들은 씁쓸함을 곱씹어야만 했다.
이런 현실은 정부가 내세우는 ‘콘텐츠 동등 접근권’이라는 개념에서 비롯되었다. ‘콘텐츠 사업자는 주요 방송 프로그램을 다른 사업자에게도 공정하고 합리적인 가격으로 차별 없이 제공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 골자다. ‘시청자가 어떤 플랫폼에서든 원하는 콘텐츠를 시청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결과이다. 하지만 속내를 따져보면 정부가 신규 유료 플랫폼 사업자에게 시장 진입장벽을 낮춰주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는 게 정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비자의 선택권’은 사실상 의미가 없어졌다. 더 좋은 상품을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하고서라도 구입하거나,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상품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에서 시청자들은 그저 비슷한 가격에 비슷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사업자 가운데 결합상품 하나를 고를 수 있을 뿐이다.
방송 콘텐츠 제작자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콘텐츠를 시장경제 원칙에 따라 수요와 공급에 맞춰 합리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권한을 박탈당했다. ‘내 콘텐츠를 어떤 사업자에게 팔 것인가, 혹은 말 것인가?’ ‘어떤 플랫폼이 내 콘텐츠의 가치를 가장 극대화시켜줄 수 있는가?’ 등 콘텐츠 유통에 대한 전략적 선택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결국 정부가 내세우는 네트워크 중심의 정책은 콘텐츠 시장을 사실상 고사시키는 단계로 위축시키고 말았다.
나아가 정부는 ‘블랙아웃을 방지하겠다’며 지상파 방송사와 유료 플랫폼 사업자들 간의 재송신 협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려 하고 있다. 콘텐츠 제작자는 자신의 생산품을 어느 플랫폼(시장)에 내놓을 것인가를 전혀 선택할 수 없게 된 셈이다. 또 제품 (방송콘텐츠) 출하 시장을 선택하지 못하게 되면 그 가격을 제대로 받을 수 없을 것은 뻔한 이치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도 더 많은 돈과 노력을 투자해 좀 더 좋은 콘텐츠를 제작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블랙아웃은 분쟁에서 누구라도 피하고 싶어하는 최후의 단계이다. 하지만 정부가 자유경쟁을 원칙으로 여러 사업자에게 허가를 내준 만큼, 이들은 콘텐츠 구매를 놓고 마땅히 차별화 경쟁을 벌여야 한다. 그래야만 소비자들도 원하는 플랫폼을 선택해 자신들의 맘에 드는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방송 콘텐츠 시장의 질적 향상을 불러오는 선순환 구조의 확립이다. 유료방송서비스 도입의 근본 취지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협상이 파행을 빚어 블랙아웃이 발생하게 될 상황이면 해당 사업자는 소비자들을 설득하고 양해를 구하는 일을 마땅히 감당해야 한다.
‘블랙아웃은 무조건 안된다’는 정부의 방침은 유료방송 사업자들이 소비자를 볼모로 잡고 콘텐츠 협상을 외면하도록 부추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플랫폼뿐만 아니라 채널도 수백개로 늘었다. 케이블, 위성, IPTV 등 유료방송 사업자들은 많게는 200개가 넘는 채널로 패키지 상품을 구성해 소비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다양한 OTT 사업자들도 100여개의 채널을 묶어 서비스하고 있다. 언뜻 보면 과거에 비해 소비자의 선택 폭이 넓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말 소비자에게 선택의 폭이 커졌는가는 한번 깊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민영동 | 한국방송협회 대외협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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