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학봉의 초상화가 궁금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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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아침을 열며]학봉의 초상화가 궁금한 까닭은

가짜가 넘쳐나는 세상에 얼마 전 들은 학봉 선생의 초상화 얘기가 예사롭지 않다.

조선시대 문신이자 학자인 학봉 김성일(1538~1593)의 후손들은 지난해 여름 화가 김호석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학봉은 서애 류성룡과 함께 퇴계의 학문을 이어받은 수제자로 임진왜란 때 초유사로 순절했다. 왕실의 권력이나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백성을 위한 직언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의성김씨 문충공파 후손들은 학봉 선생의 초상화 없이 제를 지내다가 모습을 재현한 초상화를 마련하기로 한 것이다.

 

후대에 길이 남을 진영을 두고 누가 그리는 것이 좋을까 고심하며 오랜 시간 물색하던 후손들은 투표까지 거쳐 초상화에 일가를 이룬 수묵화가 김호석 화가에게 초상화를 맡기기로 결정지었다. 그러나 제안을 받은 화가는 깐깐하게 굴었다.

 

첫 대답으로 “농사부터 지으라”고 한 것이다. “학봉 선생이 글을 쓰며 당시 사용했을 ‘감닥나무(감잎 모양 닥나무)’ 한지를 그대로 재현해 그 종이 위에 그려야 하니 감닥 농사를 우선 짓고, 선생이 입으셨던 안동포의 천연 쪽빛은 1000여평 땅에 쪽 농사를 지어 그 잎에서 따와 물들여야겠으니 또 그 농사도 지으셔야겠습니다.”

 

문중 사람들은 처음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개중에는 영문을 몰라 화가의 까다로운 요구에 언짢아하는 이도 있었다. 값비싼 수입안료까지 품질 좋은 재료가 흔한 요즘 초상화 한 점을 그리기 위해 쪽이며 감닥나무며 일일이 농사짓고 재현한다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가의 마음을 알아챈 후에는 순순히 모든 것을 “그렇게 하겠노라”하며 오히려 고마워했다. 학봉의 얼굴은 물론 그의 꼿꼿한 선비정신, 그 시대의 삶까지 초상화에 녹여 ‘진짜’에 다가서겠다는 화가의 진정성이 전해진 것이다.

 

김 화가는 며칠 전 문충공파 후손 100여명이 한자리에 모인 곳에도 다녀왔다. 400여년이 흘렀지만 후손들에 남아 있을 생김새의 흔적을 꼼꼼히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턱수염은 어떻게 났는지, 미간주름은 어떤 모양인지, 광대뼈와 콧대 높낮이는 어떤지…. 초상화를 의뢰받은 후 경북 안동 와룡에 있는 학봉의 종택과 묘소, 학봉의 조상과 후손들이 자라고 뛰어놀았을 터전도 여러 차례 둘러봤다. 그곳에서 흙도 퍼왔다. 황토는 아니지만 학봉이 태어나고 묻힌 땅의 흙을 안료 삼아 자연스러운 피부색을 낼 참이다.

 

마침내 이번주 목요일에는 감닥나무로 만든 한지를 처음 뜨기로 했다. 깨끗하며 보풀이 적고 선비의 기개를 닮았는지 잘못 붓을 갖다대면 쩍 갈라지는 감닥나무 한지는 명맥이 끊겨 있었다고 한다. 중국의 옛 종이는 ‘선지’, 일본의 것은 ‘화지’로 불리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다.

 

하지만 한지는 아직 그 우수성을 인정받지 못한 상태다. 한때는 진짜 한지의 전통성을 무시하고 중국의 선지와 일본의 화지를 한데 섞어 정체성이 애매한 ‘화선지’를 마치 우리 종이인 양 써온 때도 있다.

 

‘학봉지’(가칭)로 이름 붙일 감닥나무 한지에 학봉이 쓰던 벼루와 붓을 이용하고, 종택 앞밭에서 오는 8~9월 꽃을 피우는 쪽의 잎을 따다 쪽빛을 얻으면 올해 안에는 학봉 선생의 초상화가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초상화는 당시에 그린 진짜일 수는 없어도 가짜는 아니다. 적어도 최선을 다한 이 시대의 진짜인 것이다.

 

학봉의 초상화가 기대되는 것은 특히나 거짓 증언과 거짓 사과, 가짜 뉴스가 판을 치는 요즘이기 때문이다. 탄핵정국에서 진실을 은폐하려는 자들이 숱하게 내뱉은 거짓 증언들에 이젠 진절머리가 난다. “사익을 취한 적 없이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했다”는 국가 최고지도자의 국민대담화 속 거짓말도 허망할 뿐이다. 한국에서도 탄핵·조기대선 정국에 가짜 뉴스가 불거지고 있지만 전 세계가 가짜 뉴스로 몸살을 앓고 있다.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가 “정보·기술(IT)업계가 가짜뉴스 퇴치 기술개발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하고 나섰을 정도다. 페이스북과 구글은 프랑스 대선에서 가짜 뉴스 차단을 위해 프랑스와 공조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가짜 뉴스가 과연 IT기술에 의해 차단되고 없어질 수 있을까.

 

거짓에 무디고 가짜에 관대한 사회는 언젠가 그 부메랑을 받게 돼 있다. 진실의 힘을 가볍게 여긴 사회는 더욱 큰 불행에 직면함을 우리는 안다. 검은 점 한 점으로 진짜를 향해 치열하게 다가서려는 화가의 그것처럼, 강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광장을 채운 80만의 촛불은 그래서 더욱 고귀하다. 가짜와 거짓을 넘어 진짜 세상을 그리려는 몸짓이다.

 

김희연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