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중독자의 야간비행]문화전쟁의 종착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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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문화중독자의 야간비행]문화전쟁의 종착역

여기는 미국 워싱턴. 국회 사무실로 우편물이 날아든다. 그 속에는 도널드 와일드먼(Donald Wildmon)이라는 근본주의 목사의 분노에 찬 글이 실려 있었다. 때는 1989년 4월5일. 이른바 ‘문화전쟁(Culture War)’이라 불리는 극우 정치가와 예술가의 한판승부가 벌어진 것이다. 청와대발 예술인 블랙리스트 파동이 한창인 지금, 미국발 문화전쟁 사건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화전쟁의 주인공은 뉴욕에서 태어난 안드레 세라뇨(Andres Serrano)란 사진작가다.

 

그는 1965년 출범한 미국 문화예술지원기관(NEA)에서 책정한 예산 지원하에 전시회를 열던 중이었다. 시비의 근원은 종교, 죽음, 섹스를 주제로 다루는 안드레 세라뇨의 작가정신이었다. ‘오줌 속의 예수(Piss Christ)’라 불리는 사진은 작가의 오줌, 정액, 피가 섞인 통에 빠진 십자가를 표현한 작품이다. 이를 기독교에 대한 신성모독이라고 비난하는 종교인의 일갈은 미국 제일주의를 주장하는 공화당원들의 좋은 요릿감이 된다. 그들은 서둘러 ‘헬름스 수정조항(Helm’s Amendment)’이라는 악법을 만들어낸다. 이를 통해서 NEA의 예술지원 기준을 강화하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다.

 

섹스와 종교에 대한 불경, 동성애 등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명 ‘예술가 탄압법’은 예술가와 자유주의자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이 사건은 결국 헌법 수정조항 제1조인 언론, 집회, 청원의 자유, 즉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 주장하는 예술가 집단의 판정승으로 끝난다. 여기서 예를 들어 보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섹스에 대한 불경이라고 못박는다면 인간의 나체를 소재로 한 수많은 걸작들이 화형식을 치러야만 할 것이다. 제임스 헌터(James Hunter)는 저서를 통해 이러한 현상을 ‘냉전시대보다 더 심각한 문화전쟁의 상황’이라고 지적한다.

 

예술의 생명은 누가 뭐라 해도 표현의 자유가 최우선이다. 1950년대 이후 동구권으로부터 문화후진국이라 손가락질을 받았던 미국은 늘 열등감에 시달려야 했다. 패권주의를 신봉하는 타락한 파란 눈의 정치인들에게 예술가란 눈엣가시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따라서 민심을 조장하려는 권력자의 의중을 간파한 예술가들의 일상은 그리 자유롭지 못했다. 미국 예술후원기관이 프랑스보다 무려 40년이나 늦게 만들어진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모든 예술작품이 사회정치적 이슈를 담을 필요는 없다. 이 또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역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을 통해 일그러진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예술혼을 탄압하는 사회는 후진국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21세기판 예술가 탄압의 증거인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낱낱이 밝혀지고 있다. 명단만 존재할 뿐 이를 지시, 작성, 보고한 자가 없다던 혐의자들의 주장이 모두 허구였다는 특검의 발표가 새해 벽두를 장식했다. 통쾌하기보다는 안타까운 기류가 시야를 어지럽힌다. 한국발 문화전쟁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지원은 고사하고 창작자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려는 정부의 태도가 출발역이라면, 모든 창작자가 마음껏 상상력을 표출하는 공정사회가 종착역일 것이다.

 

예술가란 정치적 자기검열의 틀에 갇히는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유리벽 같은 존재다. 예술가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그곳은 뇌사상태에 빠진 권력자가 지배하는 디스토피아와 다를 바 없다. 천국은 먼 곳에 있지 않다. 예술과 삶이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는 공간. 그곳을 우리는 천국이라 부른다. 예술다운 예술이 존재하는 참세상을 꿈꾸며 오늘도 야간비행을 시작한다.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 <음악을 읽다>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