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영화계에서는 황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15세 관람가로 알고 출연을 결정한 여배우 ㄱ은 부부강간 장면을 촬영하면서 상대역인 남배우 ㄴ에게 성추행을 당한다. 남배우 ㄴ은 “표정연기 등을 통해 강간상황을 암시한다”는 합의된 수위를 넘어 여배우 ㄱ의 상의와 속옷을 찢고 어깨를 주먹으로 가격했으며, 여러 신체 부위를 더듬었다. 여배우 ㄱ은 이를 신고했고, 검찰은 남배우 ㄴ을 강제추행치상으로 기소했다.
그런데 법원은 그가 연기에 “과몰입”한 것뿐이라며 무죄를 선고한다. 더 문제적인 것은 감독이 여배우 ㄱ 몰래 남배우 ㄴ에게 “미친놈 같은” 강간 연기를 지시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여배우가 영화 현장에서 어떻게 대상화되고 도구화되는지 보여준다.
여기서 등장한 “과몰입”이라는 표현은 매우 영리한 선택이다. 한국 사회의 성폭력에 대한 몰이해와 ‘예술행위’에 대한 낭만적 판타지를 절묘하게 조합해 냈기 때문이다. 무엇이 예술이냐, 혹은 예술은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느냐는 복잡한 논쟁의 주제다.
그러나 예술이 ‘천상의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만은 명백하다. 예술은 세속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며, 따라서 “과몰입”의 성격 역시 문화적으로 결정된다. 그리하여 질문해야 하는 것은 한 배우가 합의 없이 그런 식으로 과몰입해 버릴 수 있었던 그 ‘용인의 문화’다.
그 용인의 문화야말로 한국 영화의 저열한 여성 재현뿐만 아니라 영화계 내 성폭력의 근본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특히 영화학교-영화제-영화비평-영화산업-영화정책 등으로 연결되어 있는, 영화제도 내의 남성화된 카르텔 속에서 만들어진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몇 년 전, 한 국제영화제에서 프랑스의 유력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의 역대 편집장 세 명과 국내 평론가 두 명의 대담 자리가 열렸다. 이 다섯 명은 모두 남자였다. 이 자리에서 ‘카이에’가 한국에서 가장 인정받는 감독은 누구냐고 질문했다. 이에 한국 남성 평론가는 자신만만하게 “만장일치로 홍상수를 꼽는다”고 답했다. 카이에가 이를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인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나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장일치의 그 평단”은 도대체 누구인가?
이는 홍상수 자체에 대한 질문이었다기보다는, 홍상수라는 이름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작동하는 커넥션에 대한 질문이었다. 마이크를 잡은 소수의 남성 평론가들, 그들과 소통하는 소수의 남성 해외 평단, 그렇게 세계 영화제에 소개되는 한국 남성 감독들, 그리하여 만들어진 홍상수라는 ‘위대한’ 남성 감독의 이름. 나는 여전히 그 순간을 내가 최초로 목격한 영화계 남성 카르텔 형성의 원초적 풍경으로 기억한다. 누가 말할 수 있고, 무엇이 예술이 될 수 있는가는 정확하게 정치적인 문제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대학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한 감독에게서 들은 것이다. 여성이 살면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 그리고 싶어서 시나리오를 써갔더니 담당 교수가 합평을 하면서 “강간 장면을 넣는 것이 어떠냐?”고 말했다고 한다. 여성의 고통이란 강간당하는 그 순간으로밖에 재현되거나 은유될 수 없다고 상상하고, 주목 받기 위해 ‘더 센 것’을 찍어내기를 가르치는 바로 이 수준이 한국 영화 교육의 현주소는 아닌지 우려된다.
영화학도들은 그런 자들에게 교육받고, 그런 자들이 심사위원이거나 프로그래머인 어떤 영화제들을 경유해서 그런 자들이 영화를 제작하는 영화판에 들어가 스스로 그런 자가 되거나, 그런 자들이 생산한 담론의 장에서 자신의 영화에 대해 평가받는다.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다른 시선, 다른 목소리, 다른 태도, 다른 이야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때마침 들려온 페미니스트 영화인 모임 ‘찍는 페미’의 결성 소식이 반가운 이유다. 초기 결성 멤버인 배우 김꽃비씨는 한 인터뷰에서 ‘찍는 페미 프로덕션’을 만들어 새로운 영화를 찍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견고한 영화제도에 균열을 내고 다양한 색을 덧붙이는 작업은 더욱 활발하게 이뤄져야 한다. ‘찍는 페미 프로덕션’이 실험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변화 그 자체가 되기를 기대한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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