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블록버스터 전시에는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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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블록버스터 전시에는 없는 것

블록버스터란 영화계에서 단기간에 걸쳐 막대한 흥행 수입을 올린 영화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인다. 영화 매표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행렬이 한 블록 이상 늘어설 정도의 대작을 말하거나 전 세계적으로는 4억달러 이상의 매표 매출을 올린 영화를 지칭한다고 한다.

 

이 용어는 미술 전시에도 쓰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블록버스터 전시의 시초는 1976년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프랑스 인상파 특별전’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2004년 한국일보사가 주최하고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색채의 마술사 샤갈’전은 70만명의 관중을 동원했으며 6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린 전시였다. 현재 한국에서 열리는 블록버스터 전시는 주로 인상파 화가들이거나 대중적으로 익히 알려지고 교과서에 실린 서양 작가들 중에서도 비교적 쉽고 편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블록버스터 전시 작품은 주로 외국의 미술관, 화랑을 통해 빌려오는데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인맥이 결정적인 요인이다.

 

외국 미술계와의 개인적인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한국의 정치적 상황, 미술관 사정, 예산 등을 고려해보면 좋은 전시 유치는 어려운 편이다. 그렇다보니 대부분은 전시가 내세우는 작가의 작품은 2~3점에 불과한데 이를 ‘킬러 콘텐츠’라고 일컫는다. 나머지는 수준이 다소 떨어지는 작품들이거나 판화, 드로잉 또는 주변 작가들 것으로 채워지는 형편이다.

 

1월 19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경향신문> 창간 70주년 기념 <르누아르의 여인> 특별전시회에서 관람객들이 르누아르의 초상화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이상훈 기자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인상파 작가인 르누아르 전시가 열리고 있다. 대표적인 블록버스터 전시에 해당한다. 전시가 흥행을 하면 궁극적으로 돈은 기획사가 번다. 미술관 역시 대관료를 받으니까 이익이 되고 지자체는 나름 선심을 쓰게 되는 편이다. 국내에는 외국의 중요 작가, 작품을 대규모로 보여줄 만한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시립미술관은 열악한 예산과 외국 미술관과의 인맥 부족 등으로 자체적으로는 전시를 추진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시립미술관 측이 대행사를 통해 블록버스터 전시를 유치하는 것에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시민들의 돈으로 미술관을 운영하면서 시민들이 또 비싼 돈을 내고 전시를 보게 되는 상황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도 있다. 더불어 시립미술관이 대중추수적이고 대중지향적인 상품으로만 전시공간을 활용한다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좀 더 짚어볼 것이 있다.

 

대부분의 블록버스터 전시는 주로 교과서에 등장하는 익숙한 서구작가들만이 매번 불려나온다. 전시를 추진하는 측은 학부모의 교육열을 자극해 아이들에게 교육적 차원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를 표방한다. 그러나 이는 서구미술에 대한 편중된 시각을 강제할 수 있으며 익숙한 작가와 작업, 유명 작가만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편식을 초래한다. 또한 투자금을 회수하려는 기획사의 자본의 논리에서 문제들이 파생된다. 기존 블록버스터 전시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큐레이터십을 느끼기 어렵다. 대부분의 블록버스터 전시는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좋아할 만한 것, 아는 것만 보여주려는 경향 속에서 이루어진다. 왜 지금 이 작품, 작가를 보여주고 조망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 전시를 통해 궁극적으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며 미술에 대한 어떠한 깨달음을 주려 하는지 등을 언급하는 일은 무의미해진다. 자본의 논리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며 큐레이터십이 빠진 블록버스터 전시에 대한 반성과 함께 관객들 역시 지나치게 익숙한 것들의 과잉화, 동질화에 저항할 필요가 있다. 동시대 시각이미지의 소비자들은 언제나 유사한 것들을 반복해서 섭취하고 지속적으로 제공받고 유사한 경험을 강제받는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말처럼 어떤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우리를 기습하는 것, 우리를 맞히는 것, 우리를 덮치는 것, 우리를 넘어뜨리는 것, 우리를 변모시키는 것”이다. 그러니 경험의 본질은 고통이란 얘기다. 전시를 보는 궁극의 이유 역시 낯설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만나는 일이다. 그래야 익숙한 세계에서 벗어나고 관습적인 시각에서 탈주하며 새로운 감각을 만날 수 있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