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대한 책이 여러 출판사에서 이어져 나오고, 글쓰기 관련 강좌가 성황이고,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는 언젠가 책을 낼 열망으로 글쓰기에 대해 토로하는 사람이 많다. 이 정도면 책의 미래가 어둡고, 출판계에서 저자 찾기 어렵다는 말이 어색할 지경이다. 독자 수는 주는데 저자가 되려는 사람은 느는 것의 함수 관계를 생각하다보니 저자의 다양한 층위까지 들여다보게 되었다.
내가 출판사를 창업할 때 세운 원칙이 있다. 대필이나 유령 작가가 쓴 원고는 책으로 출간하지 않겠다는 거였다. 삶의 내밀한 체험, 사유, 지식을 담아내는 문장이 저자의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이미 타인의 생각을 빌린 기록에 불과하다고 굳게 믿던 때였다.
물론 한 사람의 인생을 취재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써내려간 전기처럼 쓰는 사람과 쓰이는 사람의 정체성이 정확히 드러나는 원고는 굳이 이 범주에 넣을 필요도 없다는 생각은 들었다.
근래에 나는 이 완고한 결심이 편협한 생각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던 것을 알았다. 문장 끝에 마침표를 찍느냐 찍지 않느냐를 깊이 고민하는 시인의 글과 창작하는 동안 소설 속 인물들과 동거하며 문장을 통해 캐릭터의 뼈대와 속살, 근육을 만드는 소설가의 원고에 대한 경외심이 너무 깊었다.
생전에 박완서 작가는 저소득층 여성의 삶이나 사회적인 문제보다 중산층의 세계에 갇혔다는 지적에 솔직하게 고백했다. ‘현장 취재도 해보았지만 체험을 바탕으로 한 취재가 아니어서인지 작품이 써지지 않더라. 가장 잘 아는 것밖에 쓸 수 없고 소설이란 게 뭔가 가슴 밑바닥부터 저리고 아프면서 끓어오를 때 써지니 참 곤란하고 어렵다. 중산층의 허위의식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데 의의가 있지 않느냐.’ 내가 생각한 원고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 저자만이 오롯이 쓸 수 있는 것.
그러나 세상에는 실용적 기술, 지혜 등 공유되어야 마땅한 정보와 팁도 있다. 그리고 그걸 가진 이들이 모두 글에 능한 것은 아니다. 이런 경우 대필 작가가 필요하다. 강연이나 구술을 풀어내든 취재하고 자료를 모아 저자와 호흡을 맞추어 구성하든 저자의 메시지를 독자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면 되는 것이다.
대필 작가의 존재는 판권이나 일러두기, 저자의 머리말 등을 통해 알릴 필요가 있다. 실용서를 펴 들며 도스토옙스키의 문체를 기대하는 독자는 없고, 따라서 저자의 메시지를 읽는 데 아무런 장애를 느끼지 않으니까. 더욱이 누군가의 노고를 숨기는 건 거짓말이므로.
유령 작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서구 문화권에서는 ‘고스트 라이터’라고 하여 유령 작가와 대필 작가를 통칭한다. 하지만 유령 작가가 대필하는 것은 분명해도 대필 작가가 모두 유령이 되지는 않으니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래서 ‘고스트 라이터’가 엄연히 직업으로 인정받는 그곳에서도 간간이 유령 작가의 대필이 폭로되어 유명 저자의 이름값이 허망하게 사라지고 출간된 책마저 폄하되는 일도 있다.
영화 <콜레트>에서 콜레트가 쓴 연작 소설 ‘클로딘’의 초고를 검토하는 윌리. NEW·팬엔터테인먼트 제공
유령 작가, 그것도 남편 뒤에 숨어야 했던 작가의 이야기가 상영되어 화제다. <더 와이프>는 소설이 원작이며 <콜레트>는 실화가 바탕이다. <더 와이프>의 아내는 자신이 쓴 작품으로 남편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사실에 진심으로 기뻐하고 자축한다. 작가로서 자의식보다 부부로서의 의리, 이미 시작한 거짓놀이를 멈출 수 없는 시스템 등이 작동했다. 하지만 노벨상을 수상하러 가는 동반 외출에서 아내는 남편의 허위와 위선을 목도한다. 아내는 더는 견딜 수 없다는 생각에 폭발 직전이지만 그 사실을 눈치챈 기자에게조차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가족의 문제로 환원한다.
반면 <콜레트>는 세기말 프랑스의 베스트셀러를 남편의 이름으로 출간했던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의 이름 찾기, 새로운 자아 발견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다. 콜레트는 펜의 힘을 강조하지만 작가로서, 나아가 여성으로서의 당당함은 유령 작가를 벗어났을 때 제대로 생겼다. 남편 이름으로 발표한 작품이 여성의 체험기이기에 사람들은 아내 콜레트가 대필했을 거라고 짐작하지만 더 알려 들지 않았다. 콜레트는 영감 외에도 거짓말, 죄책감 등과 맞서야 했다. 그렇게 나서지 않았던들 지금 같은 존재감으로 빛날 수 있었을까.
유령 작가는 세상에 없는, 실체도 책임감도 묻기 어려운 존재지만 대필 작가는 프로 의식과 정체성을 지닌 어엿한 저자다. 수많은 경험과 지식이 활자를 갖추지 못해 사라진다. 그럴 때 글쓰기, 대필이 하나의 ‘기술’로 인정된다면 문화의 ‘디테일’은 더욱 살아날 것이다. 그때면 독자의 층위도 널리 다양해지고, 출판이 즐거울 일도 더 늘지 않을까.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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