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시선]나는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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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시선]나는 아빠다

5월은 평범한 가장에게는 참 힘겨운 달이다. 5월5일 어린이날에서 시작된 고난의 행군은 8일 어버이날을 찍고, 부처님오신날로 이어지는 연휴로 마무리됐다. 총 2주일에 걸친 고난의 행군을 무사히 마친 이 땅의 모든 아빠들에게 ‘진짜사나이’적 연대를 보낸다. 우리는 해냈다. 



길고 긴 고난의 행군을 마친 지난 19일 일요일, TV를 켜고 프로야구 중계를 틀었다. 거실의 기다란 안락의자에 누워 일요일의 망중한을 즐기고 있던 순간. 아이들과 아내가 “아빠, 아빠! 어디가? 봐야 되는데!”라며 다가왔다. 난 속으로 (어디를 가기는) “프로야구 볼 거야!”라고 했지만, 직감적으로 TV 리모컨을 넘겨야 하는 타이밍이라는 걸 깨닫고, 일어나 스마트폰 앱을 실행시키며 재빨리 이어폰을 찾아 귀에 꽂았다. 그리고 좀 심통 맞은 목소리로, “괜히 아이들 데리고 나오는 프로가 뭐가 재미있어!”라고 이야기했지만, 아내와 딸은 이미 TV를 보며 웃고 있었다.



<아빠! 어디가?>는 새롭게 뜬 MBC의 간판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다. 아나운서, 가수, 축구선수, 배우인 네 아빠가 자신의 아이와 함께 48시간 동안 함께하는 걸 재미나게 보여준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은 아이들과 어디론가 떠나지 못하는 수많은 아빠들에게는 좀 불편하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 대한민국의 평범한 아빠들 중에서 온전히 아이와 48시간을 내어 함께 놀아줄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48시간이 아니라 단 몇 시간이라도 아이와 놀아주는 일 자체가 쉽지 않다. 시간을 냈다 해도 노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놀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MBC <일밤-아빠! 어디가?>



지금 아이와 놀아줄 아빠인 30~40대들에게는 어렸을 적 아빠와 놀았던 기억이 없다. 놀았던 건 고사하고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눈 기억조차 없는 이도 있을 것이다. 먹고살기 위해, 경쟁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내 아이는 나보다 더 좋은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아빠는 늘 바빴다. 가끔 보는 아빠는 거나하게 취해 있거나, 아니면 피곤에 지쳐 잠을 자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아빠와 놀아본 기억이 없으니, 아빠가 되어도 아이와 놀기 쉽지 않다. 휴일이 되면 의무처럼 교외로 나가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다. 어느새 아이들은 훌쩍 자라고, 아빠는 서서히 가정에서 소멸된다. 그리고 마침내 중년이 되면 거실에 홀로 덩그러니 남는다.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인기있는 아이템 중 하나가 붕괴된 가족을 도와주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가족의 문제는 대개 ‘아버지’에게서 시작된다. 소통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가족 간의 갈등이 이어진다. 얼굴을 가리고 나온 가족들은 아버지와 대화가 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술만 마신다, 아버지는 폭력을 행사한다는 등의 증언을 남긴다. 하나같이 비슷한 상황이다. 고집만 남은 아버지와 그 아버지에게 분노하는 가족으로 도식화된다. 좀 더 과장되게 확장하면 아빠의 문제는 곧 중년의 문제다. 아이들과 노는 법을 모르는 아빠들은 바깥에서 유흥을 즐긴다. 그 유흥이란 건 대개 뻔한 순서다. 술에 취하고, 자기 관리는 무너지고, 온갖 탐욕에 물든 중년 남자가 된다.



모든 불행은 아빠와 놀지 못했던 지난날의 기억에서 시작된다. 아이와 놀지 못하는 아빠는 아빠와 노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를 만든다. 대를 잇는 불행은 끊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아빠가 되어야 할까? 아이들과 노는 걸 고민하기보다 먼저 내가 놀 수 있어야 한다. 아버지가 그런 분이었다.



아버지의 나이가 된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빠는 굉장히 말랑한 분이었다. 어느날 친구에게 낙관을 선물받더니, 동양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몇 점을 그려 동네 표구점에 표구를 맡겼는데, 거기서 한 점이 팔리기도 했다. 먹을 갈고, 한지를 꺼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는 건 참 좋았다. 나도 덩달아 그림을 그려보기도 했다. 당구도 꽤 치셨던 것 같고, 바둑도 나름 급수가 있어 은퇴 후 기원에 다니시기도 했다. 은퇴하고 시골에 내려가서 소일하셨을 때에는 난과 분재를 하고, 교회에서 설교자로 나서기도 하셨다. 제일 재미있었던 건 은퇴 후 홀로 집에서 시를 쓴 다음 손수 시집을 묶어낸 일과 전공(역사학)을 살려 썼던 ‘소현세자’를 출판사에 투고해 소설가로 데뷔한 일이다. 다재다능했다기보다는 늘 스스로 즐길 일을 찾았다. 나도 그 취미에 가끔 동참했다. 저수지나 바닷가에 낚시를 가기도 했고, 난을 캐러 산을 뒤지기도 했고, 소설 교정을 보기도 했다. 심지어 아빠가 사다 준 만화잡지와 만화책 때문에 난 지금 만화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중년의 남성들이 겪는 위기는 바로 아빠의 위기다. 아빠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억지로 아이와 놀아주려고 하기보다는 내가 먼저 놀아야 한다. 



어떻게 놀아야 할지 모르겠으면, 내가 좋아하던 걸 기억해 보자. 만화? 게임? 영화? 스포츠? 여행? 자동차? 뭐라도 좋다.




박인하 |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만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