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다. 7월의 더위는 8월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7월, 가을은 아직 멀고 8월이라는 또 다른 여름을 기다리는 시간. 그래서일까. 내게 여름이 떠오르는 영화란 그리 호방하거나 낙관적이지 않다. 어쩌면 가을과 겨울이라는 스산하고 차가운 상징을 예고하는 영화를 상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여름에 다시 만나보는 영화와 음악을 골라 보았다.
<기쿠지로의 여름>. 배우 겸 감독으로 등장하는 기타노 다케시의 역작이다. 로드무비 형식으로 제작한 <기쿠지로의 여름>은 소외와 위로에 관한 영화다. 건달 역으로 등장하는 기타노 다케시는 외톨이 소년과의 짧은 여행에서 생의 의미를 회고한다. 히사이시 죠가 연주하는 피아노 독주곡 ‘Summer’는 블로그 배경음악으로 사용했을 정도로 맑고 살가운 여운을 남긴다. 히사이지 죠는 자서전에서 자신은 감독의 마음에 들기 위한 곡보다 사람들을 위한 곡을 만든다고 말한다.
<기쿠지로의 여름> 메인 포스터
<그랑브루>. 1990년대 도심카페의 벽면을 장식했던 영화포스터의 주인공이 바로 <그랑브루>다. 바다를 배경으로 생명과 자연이라는 담론이 펼쳐지는 뤽 베송 감독의 작품이다. 영화음악을 담당했던 에릭 세라는 장 미셀 자르와 함께 프랑스 전자음악의 대표주자로 활약한다. <그랑브루>는 인간은 모든 꿈은 현실가능성을 동반해야 한다는 관념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에릭 세라의 배경음악은 영화의 분위기를 주도한다기보다 은은하게 보듬어주는 역할에 주력한다.
<졸업>. 기성세대와의 단절이나 사회의 부정적 현실에 관한 문제를 주로 다루었던 일명 ‘아메리칸 뉴 시네마’를 대표하는 영화다. 배우 더스틴 호프만이 여름 수영장 속에서 세상을 응시하는 장면은 결말부와 함께 <졸업>의 압권에 속한다. 사이먼 앤드 가펑클이 부르는 ‘Sound of silence’의 가사는 영화를 매조지하는 매개체로 부족함이 없다. <졸업>이 등장했던 1960년대 말의 미국은 노랫가사처럼 침묵의 소리로 울렁이는 반문화의 시대를 겪고 있었다.
<서머타임 킬러>. 작품 자체보다 영화음악과 배우가 주목받았던 작품이다. <서머타임 킬러>는 범죄극이라는 설정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영화주제곡 ‘Run and run’이 등장한다. 1970년대는 프랑스영화가 미국영화의 물량공세에 저항했던 마지막 시대에 해당한다. ‘Run and run’으로 인해 <서머타임 킬러> LP를 구하려는 음반수집가가 등장하기도 한다. 주연 올리비아 핫세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통해 유명배우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태양은 가득히>. <졸업>처럼 리메이크되어 원작의 우수성을 알렸던 문제작이다. 배우 알랭 들롱은 <태양은 가득히>에서 욕망에 휩싸인 청년의 민얼굴을 무난히 소화해낸다. 연기력 부족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해소할 수 있었던 작품인 동시에 배경음악 ‘Nino Rota’는 1960년대 유럽영화의 황금기를 방증하는 추억의 곡이다. 1970~80년대 라디오 영화음악방송의 단골손님이기도 했던 ‘Nino Rota’는 프랑스 영화음악가 르네 클레망을 상징하는 곡으로 자리 잡는다.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와 함께 허진호 감독의 최고작으로 알려진 <8월의 크리스마스>는 상실과 이별이라는 단절의 언어를 영상으로 구현해낸 한국영화의 자랑스러운 기록이다. 불치병에 걸린 사진사는 죽음 앞에서 이렇게 독백한다. ‘내 기억 속에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걸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배우 한석규는 영화 주제곡을 직접 부른다. 여름의 시작과 마지막을 전하는 오래된 흑백사진 같은 음악이다.
여름은 늘 짧고 습하고, 겨울은 생각보다 길고 건조하다. 오래된 영상과 음악을 다시 보고 듣는다는 것. 이는 과거로의 소환이 아닌 현재의 일상이자 과정이다. 영상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음악은 늘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여름이면 떠오르는 영화음악이 변함없이 살갑고 소중하다.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 <취향의 발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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