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에게는 너무 쉽고, 예술가에게는 너무 어렵다.” 피아니스트 아르투어 슈나벨은 모차르트의 소나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차르트를 잘 연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랜 경험과 숙련된 기교가 아니라 어린이의 순수한 마음이라는 의미였을까? 정말로 모차르트의 음악과 어린이 사이에 일맥상통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 모차르트의 음악은 어린이 피아니스트의 단골 레퍼토리로 연주되고, 소위 ‘어린이를 위한 음악’ 같은 제목을 내건 음반에도 빠짐없이 등장한다.
서양음악사 속에는 어린이와 관련된 몇몇 음악이 있다. 슈만의 ‘어린이정경’이나 드뷔시의 ‘어린이 차지’, 차이콥스키의 ‘어린이를 위한 앨범’, 도루 다케미쓰의 ‘어린이를 위한 피아노곡’ 등이 그러한 예다. 내가 이 음악들을 처음 만난 것은 피아노를 매일 연습하던 청소년 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어린이를 위한 것이니 한층 쉽겠지’라고 생각하며 자신만만하게 악보를 펼쳤지만, 예상만큼 쉽지 않아 씁쓸한 마음으로 악보를 덮었다. 작곡가들이 상상한 어린이 수준에 못 미치는 청소년이 된 것 같아 속상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곡들은 어린이가 연주하라고 만들어놓은 곡이 아니었다. 어린이는 연주자나 청취자가 아니라 표현 대상이었다. 그 음악이 상당히 ‘어른의 시점’에 입각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뒤로는 그러려니 한 채 그 음악들을 잊고 지냈다.
어린이에 관한 음악을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어린 조카와 함께 생활하면서부터다. 가족들은 내게 가끔 “고모가 음악을 전공했으니 조카에게 피아노도 쳐주고 좋은 음악도 들려줘”라고 요청했다. 조카에게 줄 수 있는 게 달리 없으나 음악만큼은 잘 골라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이에게 좋은 음악이 무엇일지를 상상하는 과정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물론 나름대로 동심을 표현했다는 서양음악사의 사례나 최신 인기 동요, ‘어린이를 위한 음악’ 목록들을 접할 수 있었고 이들이 나름대로 좋은 출발점이 되는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기엔 조금 아쉬웠다. 음악을 세계를 경험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우리의 감각을 확장시키는 것을 좋은 음악이라 믿는다면, 아이에게 보다 유연한 형태로 음악을 선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얼마 전, 팀원으로 몸담고 있는 아츠 인큐베이터의 활동을 통해 덴마크의 아방가르드 음악 축제 ‘클랑’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거기서 만난 어린이 워크숍 및 공연 프로그램은 여러모로 인상적이었다. 어린이들은 일상적인 사물로 악기를 만들거나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가 프로그램을 통해 변조되는 것을 주의 깊게 듣는 등 즉흥음악이나 유럽 전통의 현대음악계에서 이루어질 법한 작업을 놀이로써 경험하고 있었다. 어린이만을 위한 행사는 아니었지만 올해 봄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린 ‘소음장난’에서도 어린이들은 아티스트와 함께 여러 사물과 전자기기를 앞에 둔 채 음악을 만들어냈다. 더 나아가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와 공연창작집단 뛰다가 제작한 ‘하늘아이 땅아이’ 등 영·유아를 대상으로 한 공연도 종종 열리고 있다. 어린이를 현장으로 초대하는 만큼 이런 사례들에서 음악 및 공연의 형태는 이전의 관습과 사뭇 달라져 관객과 공연자의 관계도 재설정되고, 예기치 못한 상호작용도 발생하고, 때로는 실험성을 추구하는 최근의 사례들보다 더 실험적이고 현대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기존의 것을 어린이 시점으로 재구성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어린이의 입장을 고려해 만들어진 이 사례들은 성인 관객인 내게도 새로운 시각을 던져줬다. 그 공연들이 어린이에게 선사하는 것은 내가 예술에 궁극적으로 기대하는 ‘새로운 경험’과 결코 다르지 않았고, 심지어 그 방식은 훨씬 편안하고 다채로웠다. 어린이들이 이제까지의 관습이나 편견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테다. 어린이들은 예술을 즐거운 놀이로 받아들이며 우리가 너무나 어렵게 해내는 것을 너무나 쉽게 해내고 있었다. 언젠가 한번쯤 어린이의 음악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지 주의 깊게 살펴보면 어떨까. 거기에 많은 비밀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신예슬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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