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무부 장관 콜린 파월은 수행원들과 함께 기자회견장으로 향한다. 이라크전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연설을 위해서였다. 장소는 전쟁방지와 평화유지를 목적으로 설립한 유엔. 순간 그의 측근이 다급히 연설 장소를 변경하자고 건의한다. 콜린 파월은 머뭇거리다 기자회견을 연기한다. 도대체 2003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복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들 부시와 콜린 파월은 압도적인 군사력 우위를 바탕으로 2차 이라크전을 일으킨다. 그들은 침략전쟁을 세계에 설득해야 하는 부담이 상존했다.
파월 독트린의 주인공은 회견장 뒤에 걸린 미술 모조품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결국 그림이 방송화면에 잡히지 않도록 천으로 가린 후 기자들에게 전쟁의 이유를 강변한다. 작품의 의미를 알았던 일부 미국 기자들은 침묵으로 전쟁을 묵인한다.
당시 벽에 걸린 피카소의 그림은 ‘게르니카’였다.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가 저지른 인종말살의 현장을 묘사한 작품이었다. 무채색으로 완성한 ‘게르니카’는 현대전의 특징이기도 한 민간인 폭격의 지옥도가 펼쳐진다. 작품에 등장하는 빛은 비극의 현장을 고발하는 일종의 상징이다. 비둘기파로 분류되던 콜린 파월은 유엔을 좌지우지하던 미국 정권의 민낯을 차마 ‘게르니카’ 앞에서 드러낼 수 없었다.
피카소의 무채색 그림 ‘게르니카’
동료 브라크와 달리 예술경영에 능했던 피카소였지만 자신의 모국에서 벌어지던 참극을 간과하지는 않았다. 그는 정신적 가치에 따라 생활하고 작업하는 예술가라면 인류와 문명이 위협받는 상황을 모른 척할 수 없다고 언급한다. 피카소는 이후 한국전쟁을 미술로 표현한다. 제목은 ‘한국에서의 학살’. 1950년 7월 노근리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의 비극을 묘사한 작품이다.
1991년 아버지 부시가 일으킨 이라크전은 마치 전자오락게임을 보는 듯한 폭격 상황을 CNN을 통해 중계한다. 피가 튀고 팔다리가 떨어져나가는 전쟁의 광기를 감추기 위한 유치한 연출극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지식인 장 보드리야르는 “이라크전은 벌어지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그는 대중매체가 보여주는 실제와 허구의 세계 속에 내재하는 폭력성이 이라크전 생방송에서 펼쳐졌다고 해석한다.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프랑코가 지배하던 스페인에 보관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게르니카’는 미국 뉴욕의 현대미술관 MoMA에서 보관하다 1975년 프랑코가 죽은 뒤 1982년에 이르러서야 스페인의 품으로 돌아간다. 현재 ‘게르니카’는 스페인 마드리드의 미술관에서 보관 중이다. 청색시대와 장밋빛시대 이후 큐비즘이라는 미술사조를 선도했던 예술가는 그릇된 역사를 부정하거나 모른 척하지 않았다.
이후 침략전쟁을 냉소하는 수많은 ‘게르니카’가 등장한다. 그중 하나가 ‘이라크니카’라고 불리는 작품이다. 제목처럼 이라크전의 참상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금도 중동지역에서 종교전쟁이 한창이다. 앞으로도 ‘게르니카’와 ‘이라크니카’를 능가하는 수많은 반전미술이 등장할 것이다. 동시에 전쟁을 반대하는 지각 있는 예술가가 끊임없이 등장할 것이다.
그룹 핑크 플로이드의 리더였던 로저 워터스는 1차 이라크전과 톈안먼 대학살을 소재로 한 음반을 발표한다. 제목은 닐 포스트먼의 저서를 패러디한 〈Amused to Death〉. 표지에는 TV에 비친 자신의 눈을 응시하는 원숭이가 등장한다. 빌보드는 이 음반이 최근 10년간 가장 도발적이고 예술적으로 두각을 보인 작품이라고 인정한다. 미술이 아닌 음악을 통해서 반전과 평화를 외치는 제2의 이라크니카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음란한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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