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세상]코미디 소재의 마르지 않는 샘물,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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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문화와 세상]코미디 소재의 마르지 않는 샘물, 군대

이영미 | 대중문화평론가



 

오랜만에 ‘빵 터졌다’. 정말 눈물이 찔끔 나오도록 원 없이 웃었다. 공군 사병들이, 넓디넓은 활주로에서 눈을 치우며 “제설 제설 눈이 내려서/ 제설 제설 넉가래로 밀어”라는 가사로,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의 노예노동의 노래를 부르는 첫 장면부터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제목도 멋지게 <레 밀리터리블>이다. 


장발장의 애인 코제트는 폭설 때문에 어렵사리 면회를 왔는데, 제설 작업장에서 삽질해야 하는 장발장 때문에 안타까운 사랑 노래를 부른다. 와, 눈물 난다! 제설 작업을 감독하는 악독한 자베르는, 장발장에게 면회를 허락하지만 한 시간 안에 돌아올 것을 명하고, ‘허벌나게’ 뛰어가서 코제트 얼굴을 딱 10분 보고 돌아서려는 장발장에게 코제트는 “저 눈이 나보다 더 중요하니?”라며 슬픈 이별 노래를 부르고, 관용 없는 자베르는 장발장을 잡으러 면회소에 찾아온다. 정말 ‘미저러블’하다. 공군 군악대가 제작해 유튜브에 올려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tvn 채널에서는 <푸른 거탑>이 원 없이 웃겨주고 있다. 1980년대 코미디 프로 <유머 일번지>의 인기 코너 ‘동작 그만’을 연상시키는데, 시대가 달라졌으니 내용도 한 수 위다. 패러디 원작인 <하얀 거탑>이 병원의 권력관계와 비리가 초점이었으니, <푸른 거탑>의 초점도 한 내무반의 권력관계와 군의 속살이다. 힘든 임무가 떨어질 때마다 “젠장, 말년에 유격이라니! 타령만 하는 병장부터, 후임병들 괴롭히는 낙으로 사는 사이코 상병, 조금씩 잔머리 굴리기 시작하는 일병, 어리보기 신병에 이르기까지 군 내무반에서 벌어지는 훌륭한 명분의 일들이 실상 어떤 모습인지를 들추어낸다.


군대 얘기는 참 뻔한데도 늘 웃긴다. 그건 경직, 불일치 같은 희극성의 핵심을 드러내기 좋은 소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신성한 국방 의무, 멸사봉공이란 큰 명분부터, 서슬 퍼런 일상의 규율에 이르기까지 군대라는 조직의 어쩔 수 없는 경직은, 그 자체가 웃음거리일 수 있다.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가 아니니 늘 원칙의 균열이 일어나기 마련이고, 그사이의 불일치와 충돌이 웃음거리가 된다. 강고한 원칙과 명분으로 포장되어 있으나, 실상 그 속살은 자잘한 이득과 안락을 챙기기 위한 잔머리 굴리기와 술수들로 채워져 있다.


tvN <푸른거탑> (경향신문DB)


그러나 이렇게 드러나는 인간 본성은 의 추악함이 (폼 나는 수준이 아니라) 유치하고 ‘찌질한’ 수준이니 우스울 수밖에 없다. 국군뉴스에 보도되는 유격훈련과 태권도 시범은 멋지지만, 말년 병장은 거기에서 열외가 되기 위해 상한 우유 먹는 걸 마다하지 않고, 태권도 단증을 따기 위해 가랑이를 잘 찢어야 한다는 둥, 발차기의 각이 살아야 한다는 둥 기백이 넘쳐야 한다는 둥, 온갖 지옥훈련을 마다하지 않았는데(이때 배경음악은 <황비홍>이다) 정작 당일에는 동작 하나 제대로 해보이기도 전에 숙취로 맛이 간 심사관이 ‘전원 초단 승급’을 내려 모두를 ‘허탈 멘붕’에 빠뜨리고, 명절날 병장 위로차 방문하는 사단장 때문에 정작 사병은 아스팔트 대청소와 보수 작업에 죽어나며, 혹한기 훈련의 거창한 명분 뒤에 하는 일은 화장실의 언 똥을 치우는 일이다.


더 웃기는 것은,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밑바닥까지 다 드러내고서도 결코 웃을 수 없으며 극도로 처절하고 진지하다는 점이다. 이 비루한 행동들에 곁들여진 음악은 비장하고 진지한 <레 미제라블>과 <하얀 거탑>의 음악이니 그 불일치가 어찌 우습지 않으랴. 그러나 이 군대 이야기의 가장 큰 공감의 토대는 바로 이런 경직과 불일치, 사소한 권력과 이득을 위한 잔머리, 뻔히 속이 들여다보이나 뻔뻔히 표명되는 원칙과 명분 등을, 사회 구석구석에서 일상처럼 겪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군대 안 가본 사람들에게도 이 황당한 시추에이션들은 결코 낯설지 않다. 우리 현실이 빨리 바뀌지 않는 한, 아마 군대는 꽤 오랫동안 코미디 소재의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