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딴따라에게 날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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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문화비평]딴따라에게 날개를

민은기 | 서울대 교수·음악학


 

내가 대학을 다닐 때, 음대 학생식당을 다른 단과대학 학생들이 ‘딴따라’ 식당이라고 불렀다. 음대생들을 얕보고 한 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별로 화가 나지 않았던 것 같다. 자기들과는 확실히 다른 우리들에 대한 동경이나 호기심도 섞여 있을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리라.


그때 음대를 같이 다녔던 학생들은 졸업하고 무엇이 되었을까? 그 중에 조수미와 진은숙같이 세계적인 음악가가 된 사람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저 그런 기성세대 음악가가 되었고, 또 적지 않은 경우 음악가의 꿈을 접었다. 어쨌든 소위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다고 그들이 취직을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이나 회한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어차피 취직을 하려고 음악을 전공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조수미가 되지 못한 아쉬움은 있겠지만.


그런데 요즘 젊은 음대생들은 이런 호기도 부리지 못한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실시하는 대학 평가 때문이다. 취업률을 대학 평가의 기준으로 삼아 부실 대학을 가린다고 하니 대학에서는 취업이 안되는 예술계 학생들이 애물단지가 되었다. 예술계 학생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대학 전체의 취업률을 깎아먹는 꼴이다. 다급해진 대학들이 예술계 학생들의 입학 인원을 대폭 줄이고 있다.


예술대 학생들이 교육과학기술부의 평가 기준 폐지를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경향신문DB)




음대나 미대의 정원을 줄이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대학들의 예술계 학생 정원이 지나치게 많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교과부가 걱정하는 인력수급 불균형의 대표적 사례가 될 만하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음대로 진학하려는 학생 수가 줄지 않는다는 것이다. 변화가 있다면, 전에는 클래식 음악 분야에 학생들이 몰렸지만, 요즘은 소위 실용음악 쪽으로 몰린다는 것뿐이다. 두세 명씩 뽑는 전공에 수백명이 지원하다보니, 100 대 1 정도의 경쟁률은 더 이상 화젯거리도 아니다.


그러나 졸업 후 이들의 취업은 요원하기만 하다. 대학 탓도 아니고 학생들 탓은 더욱 아니다. 이 분야에는 4대 보험을 해결해주는 직장 자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교과부의 대안이 황당하기 그지없다. 프리랜서 예술가로 활동하는 경우 취업한 것으로 인정해주겠다는 것인데, 이를 증명하려면 교과부가 인정하는 연주회장에서 공연을 하거나 1인 창업자로 사업자 등록을 해야 한다.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스스로 많은 대관료를 내고 공연을 할 수도 없고, 기성 예술가도 하지 않는 사업자 등록을 할 수도 없다. 그러니 편법으로 대학들이 나서서 대관료를 내주고 연주회를 열어서 졸업생들을 취직한 것으로 꾸미기도 한다.


음악가가 되겠다는 학생에게 취업하라고 압박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처음부터 취업이 아니라 예술활동을 하겠다며 그 높은 경쟁률을 뚫고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이 아닌가? 그들을 직장에 들어가라고 몰아붙이는 것이야말로 무책임한 일이다. 교과부의 정책도 문제지만 그것에 휘둘리는 대학들의 대응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학생들을 모두 표준화해서 취업시키는 것은 대학의 역할이 아니고 국가적으로도 손해다. 각자의 특성과 차이를 인정하고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도록 하는 것이 다양성이고 경쟁력이다.


졸업 시즌이다. 졸업을 하고 사회로 나가는 학생들의 발걸음이 가벼우면 좋으련만, 세찬 한파와 경제불황이 저들의 어깨를 처지게 만든다. 예술계 졸업생들은 더욱 그렇다. 예술가로 홀로 설 수 있는 준비가 안된 것도 불안한데, 졸지에 ‘취직도 못한’ 실업자로 대학 문을 나서야 하니까 말이다. 저들에게 날개를 좀 달아주면 안될까. 이를테면 있지도 않은 직장으로 내몰지 말고, 끼를 맘껏 발산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젊은 새내기 예술가가 당당히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출발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딴따라는 딴따라로 살게 해주어야 한다. 삶이 힘들수록 음악으로부터 위로받아야 할 인생들도 더 많아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