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기억상실 드라마가 던진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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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문화비평]기억상실 드라마가 던진 질문

한 여인이 거리에서 깨어난다. 그녀는 자신이 왜 이런 곳에서 잠들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제까지 고등학생이었는데 눈을 뜨고 보니 손에는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다. SBS 주말극 <출생의 비밀>은 하루아침에 해리성 기억장애를 겪게 된 주인공 정이현(성유리)에 관한 이야기다. 그 전작이었던 <돈의 화신> 역시 기억상실에 걸린 주인공을 등장시켰다. 이강석(강지환)은 어린 시절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가족과 기억을 모두 잃는다. 고아가 된 그는 이차돈이라는 새 이름을 부여받고 자라나 검사가 된다.



이야기의 출발점도 비슷하다. 두 작품은 주인공 부모의 유훈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돈의 화신>은 ‘돈이 곧 종료’라는 이강석 부친의 유훈이 극 전체를 지배하고, <출생의 비밀>에서 이현의 모친은 임종 직전까지도 딸의 하버드 입성을 소망했다. 흥미로운 건 두 유언의 공통점이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강력한 이데올로기인 경제제일주의와 성공에의 열망을 반영하고 있다. 

 

SBS-TV 주말드라마 <돈의화신>의 스틸컷



그리고 두 작품에서 기억상실은 그 욕망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역할을 한다. 예컨대 이현의 기억이 끊긴 시점은 모친 사망 뒤, 가난에서 벗어나 “워런 버핏 같은 세계 갑부”를 꿈꾸던 1997년이다. <돈의 화신> 역시 비슷한 시기인 1998년, 강석의 부친 이중만 회장(주현)의 재산을 탐내는 자들이 벌인 사건을 역추적한다. 이러한 도입부에는 돈에 관한 욕망이 최전방에 놓이고 다른 가치들은 잊혀가는 외환위기 시대의 증후가 드러나 있다.



두 드라마는 시간적 배경을 건너뛰는 시점에서도 의미심장한 공통점을 보인다. 두 작품은 모두 10년 뒤부터 성인 시절을 그려낸다. 이것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 시기가 외환위기 시절 못지않게 경제제일주의가 지배적인 시대였기 때문이다. 당시 17대 대선에서, 각종 도덕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계승자임을 주장한 CEO형 지도자 이명박 후보가 당선된 결과가 그것을 증명한다.



두 작품에는 도덕성에 둔감한 채 부의 가치에 집중하는 그 시기의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가령 <돈의 화신>은 이중만을 살해하고 재산을 빼앗은 공모자들이 각계 유력인사가 되어 부를 확장해가는 모습을 그렸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커넥션을 통해 공고화된 권력이 부를 한 곳으로 집중시켜 양극화가 심화된 현실이 드러난다. <출생의 비밀>에서도 이현의 숙부인 최석(이효정)이 회사를 키우는 과정에서 살인 미수, 비자금 조성 등의 범죄를 숨겼다는 사실이 암시된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이현과 강석의 기억상실증은 마치 그 시기의 도덕성 마비에 대한 은유처럼 보인다.



이윽고 드라마는 시간을 더 건너뛰어 현재에 도착한다. 18대 대선이 치러졌고, 박정희의 진짜 후계자 박근혜를 선택한 표심에는 또다시 경제중심주의의 귀환이 있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두 작품은 잊혀졌던 본질적 질문을 던진다. 그동안 이현과 강석은 여전히 기억을 찾지 못한 채 경제제일주의에 동참해왔다. 이현은 예가그룹 ‘공주’로서 ‘한국의 워런 버핏’이 돼라는 최석의 격려를 받고, 강석은 비리 검사가 되어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2013년의 어느 날, 두 사람은 낯선 이의 방문을 받는다. 이현에게는 그녀의 ‘아픔을 낫게 해주고 싶다’는 남자가 찾아오고, 강석에겐 ‘진짜 이름이 궁금하지 않느냐’는 전화가 걸려온다. 이를 계기로, 두 인물은 점차 기억을 되찾으며 이제껏 외면해오던 생의 다른 진실과 대면하게 된다.



이현은 화려한 성공가도에서 ‘행복했냐’는 남자의 물음에 행복의 본질을 돌아보고, 강석은 재회한 모친의 ‘정의로운 법관’이 돼라는 말에 부조리한 사회 현실에 눈뜨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태도는, <직장의 신>에 늘 등장했던 내레이션처럼 “IMF 이후 십육 년” 동안 경제제일주의에 갇혀 다른 소중한 가치들을 상실해 온 시대에, 미스 김만큼이나 인상적인 성찰을 제공한다.




김선영 | 드라마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