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敵)을 만들지 않고 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차라리 적과 함께 살아가는 생산적인 방법을 찾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1887)에 이렇게 적었다. “도대체 진정한 ‘적에 대한 사랑’이란 것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이런 고귀한 인간에게만 있을 수 있다. 고귀한 인간은 적에게 이미 얼마나 많은 존경을 품고 있는 것인지! 그러한 존경은 사랑으로 이어지는 다리다. 고귀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자신의 특별함의 표지로 적을 요청한다. 경멸할 만한 점이 전혀 없고 오히려 매우 존경받아 마땅한 적만을 그는 용인할 수 있다!”
니체가 ‘적에 대한 사랑’ 앞에 ‘진정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자신의 주장을 기독교 도덕과 구별하기 위해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여라.”(마태복음 5장 44절) 니체는 용서의 윤리학을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적과 제대로 싸울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애초 존경할 만한 적만을 상대하라는 것.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 즉 내가 고귀해지기 위해서다. 언뜻 명장(名將)들의 결전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것은 물론 실제 전쟁이 아니라 정신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다.
존경할 만한 적과 정신의 전쟁을 치르며 고귀해지는 길이 있다면, 적에 대한 증오로 세월을 허비하느라 공허해지는 길도 있다. 후자에 대한 니체의 설명은 심오한데, 이 대목이 니체 사상의 핵심 중 하나다. “원한의 인간이 적을 상정하는 방식을 상상해 보자. 여기서 원한의 인간이 행위하고 창조하는 방식이 드러난다. 그는 ‘악한 적’, 그러니까 ‘나쁜 놈’을 상정한다. 그런 인간을 기본 개념으로 삼고, 그로부터 어떤 잔상(after-image)이자 상대(counterpart)인 다른 존재를 도출해내는데, 그것이 바로 ‘착한 놈’이다. 바로 자기 자신 말이다!”
도덕에도 계보가 있는데 기독교 도덕에 이르러 우려스러운 역전이 일어났다는 맥락에서 발설된 말이다. 적을 ‘악’으로 규정해야만 자신을 ‘선’이라 믿고 자족할 수 있는 이들의 근본 감정은 ‘원한’이고, 그것은 언제나 반작용에 불과한, 반동적인 행위만을 낳기 때문에 열등하고 위험하다는 것. 굳이 니체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타인을 부정해야만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삶은 비극적이다. 저명한 논리라 새삼 인용했지만 이 입론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정당한 비판조차 원한 감정의 소산이라 매도하는 데 오용될 소지가 있는 논리라는 점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적에 대한 사랑’이라는 말의 깊이를 다 헤아릴 수는 없으되,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내가 겨우 할 수 있는 말은 이것이다. 어떤 이를 비판할 때 해서는 안되는 일 중 하나는 상대방을 ‘비판하기 쉬운 존재로 만드는’ 일이다. 그에 대한 나의 비판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가 그의 다른 글에 이미 존재할 때, 그것을 못 본 척 해서는 안된다. 그런 비판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비판당하는 적은 황당한 불쾌감을, 비판하는 나는 얄팍한 우월감을 느끼게 될 뿐, 그 이후 둘은 ‘이전보다 더 자기 자신인’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요컨대 진정한 비판은 적의 가장 복잡하고 심오한 부분과 맞서는 일이다. 그럴 때 나의 비판 또한 가장 복잡하고 심오한 수준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하는 내 마음은 편치 않다. 나도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니체의 말대로 적을 대하는 태도는 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연결돼 있다. 적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적을 사랑하면서 고귀해질 것인가, 적을 조롱하면서 공허해질 것인가. 수많은 매체가 생겨나고, 수많은 비판들이 쏟아진다. 좋은 비판과 나쁜 비판이 있다. 전자는 어려워서 드물고 후자는 쉬워서 흔하다.
신형철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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