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최근 새 정부가 등장할 때마다 어김없이 위기에 시달렸습니다. 김대중 정부의 IMF 외환위기, 노무현 정부의 ‘카드대란’, 이명박 정부의 ‘글로벌 금융위기’가 그렇습니다. 위기가 거듭될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습니다. 경제 하나는 살릴 것으로 기대했던 이명박 실용정부 5년 내내 양극화가 극심해지는 바람에 우리는 스스로 치유를 하면서 많이 참고 기다렸습니다.
올해 ‘원칙과 신뢰’를 중시한다는 박근혜 정부가 출범했지만 한 달도 되지 않아 벌써 박 대통령이 내걸었던 약속 중에 지켜진 것을 찾아보기 어려워졌습니다. ‘경제민주화’ 같은 비전은 헌신짝처럼 내던져진지 오래고, ‘조폭 의리’의 인사만 난무하는 바람에 올바른 사람을 찾아 쓰는 용인술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번에도 위기가 어김없이 닥칠 것 같은 공포감에 시달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출판시장은 벌써 그걸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김대중 정부 때는 막연한 심리적 불안감에,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총체적 불안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래도 그 시기에는 ‘벤처열풍’이라도 불어서 누구라도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꿈이라도 꿀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계발서의 열풍이 대단했습니다.
‘성공’이라는 담론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노무현 정부 말기입니다. 자신의 꿈을 최대한 좁혀 놓고 그것이라도 이뤄지면 다행이라는 심리가 작동했습니다.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주인공들이 매주 목요일 오후에 잠시 만나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것처럼 ‘나만의 행복’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명박 정부 5년 내내 출판시장을 관통한 유일한 키워드가 ‘셀프 힐링’이라는 것은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지칠 만큼 지친 대중이 최근에는 친구 같은 멘토가 던져주는 한 줄의 어록에 그나마 위안 받았습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김난도)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혜민 스님, 이상 쌤앤파커스)이 바통을 이어가며 출판시장을 휩쓸었습니다. 합해서 500만부가 팔리는 우리 출판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대중의 삶이 얼마나 피폐했으면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경향신문DB)
위기를 하도 겪으니 도가 트는 모양입니다. 대중은 <합리적 행복>(올리버 버크먼, 생각연구소)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긍정의 심리학에 도취해 삶을 낙관했다가 좌절하고 급기야 ‘멘붕’에 빠지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일종의 비관론에 빠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더러 불행하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하며, 슬프기도 하다”는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는 것이지요.
‘합리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기 내면의 삶을 향해 비스듬한 자세를 취하는 것, 잠깐 멈춰 서서 한 걸음 물러나는 것, 긍정적이고 가장 짧아 보이는 길은 대개 보다 심오한 행복으로 가는 확실한 길과 다르다는 것을 흔쾌히 인정하는” 사고방식을 공유합니다.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하거나 성공한 사람을 따라 하거나 꼭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기보다는 하기 싫었던 일을 찾아서 하는 것입니다.
10년 동안 정치인으로 살다가 ‘자유인’으로 돌아온 유시민이 그렇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아포리아)에서 유시민은 “사는 데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품위 있게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존엄’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스스로 설계하지 않은 인생을 ‘닥치는 대로’ 열심히 살아보았자 삶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절대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실패부터 당당하게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증거도 많습니다. 신간 소설이 전반적으로 침체하는데도 <레미제라블> 같은 고전을 읽는 사람이 크게 증가하고,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주현성, 더좋은책) 같은 소프트 인문학 서적이 붐을 이루고, 새로운 리더십을 가진 인물이야기에 목말라하는 것 말입니다. 인기인들이 버킷리스트를 따라해 보던 <남자의 자격>이 폐지되는 반면에 아빠가 아이와 함께 하기 싫은 일을 해보는 <아빠! 어디 가?>의 인기가 올라가는 것이나, 여섯 살 지능에 불과한 아빠의 딸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그린 ‘웃픈’ 영화 <7번방의 선물>의 이례적인 폭발적 인기 또한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회사와 가족만을 생각하고 앞만 보고 달려온 세대가 이제 숨을 고르기 시작했습니다. 50대인 700만명에 이르는 1차 베이비부머(55~63년생)의 은퇴가 시작되고, 40대인 600만명에 이르는 2차 베이비부머(68~74년생)의 대부분은 자식들 교육 때문에 등골이 휘는 하우스푸어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저 앞만 보고 평생을 달리느라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그들이 불안, 화, 우울, 분노, 탈진, 돈 등의 화두에서 벗어날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3포’나 ‘6무’ 세대로 불리는, 그들의 자식들은 ‘먹고사는’ 문제를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부모 세대를 원망했습니다. 지난 18대 대통령 선거결과를 보고 그들은 ‘멘붕’에 빠져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제 ‘아버지’와 화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딸 서영이>의 서영처럼 부모세대도 ‘꿈’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래서 올해는 ‘삶’과 ‘죽음’, 그리고 ‘가족’이라는 화두에 온 세대가 매달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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