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은기 | 서울대 교수·음악학
바야흐로 봄이다. 자연이 변치 않는다는 일이 새봄을 맞을 때만큼 고마운 경우가 또 있을까? 삭막한 도시에도 어김없이 봄이 찾아왔으니 그저 감사할 일이다. 개학을 맞이한 캠퍼스는 기대감에 들뜬 새내기들 덕분에 어느 때보다 생기와 활력이 넘친다.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가슴 설레고 소중하다.
음악에서의 시작은 서곡이다. 오케스트라 연주회도 서곡을 제일 먼저 연주하고, 오페라 공연도 서곡으로 시작한다. 서곡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흩어져 있는 청중의 관심을 무대로 끌어오는 것이다. 서곡에서 청중을 사로잡지 못하면 연주회 내내 그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연주회의 성패가 서곡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곡의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은 공연의 분위기를 잡는 일이다. 앞으로 어떤 음악적 사건이 펼쳐질 것인지 서곡만 들으면 알 수 있도록 말이다. 맛보기라고나 할까? 앞으로 나올 부분 중에서 좋은 것들을 모아 놓았으니 재미있을 수밖에. 그래서 오페라가 잊혔어도 서곡은 남는 경우가 적지 않다. ‘윌리엄 텔 서곡’은 유명하지만 정작 <윌리엄 텔>을 직접 감상해 본 사람이 거의 없는 것처럼.
카니발 축제 중인 이탈리아 베니스 세인트 마크 광장에서 '태양왕'으로 불렸던 프랑스 국왕 루이 14와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로 분장한 커플이 등장했다.
공연의 상쾌한 시작을 알리기 위한 서곡이지만 그 탄생 자체는 매우 정치적이다. 원래 서곡 양식은 루이14세 시절 오페라 극장에 제일 마지막으로 입장하는 왕을 환영하기 위해서 륄리가 만든 것이다. 륄리는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당당한 서곡들을 통해 태양왕 루이에게 강력한 통치자로서의 위엄과 아우라를 씌워주었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천민으로 태어나 천신만고 끝에 프랑스 궁정에 들어온 륄리가 왕의 환심을 사는 데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었으리라. 그렇게 륄리는 ‘왕의 남자’가 되었고 프랑스 음악계에서 독점적인 문화권력을 차지하게 되었다. 륄리의 경쟁자들은 모두 자리에서 밀려났고 파리에서는 륄리의 허락 없이 아무도 오페라를 상연할 수 없었다. 서곡이라는 아름다운 음악형식의 탄생이 음침한 음모와 권력투쟁 속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새로운 정부 출범이 그리 순탄해 보이지 않는다. 준비되지 않은 시작도 문제고, 시작도 못하게 만드는 상황도 걱정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마치 공연의 막이 올랐는데, 허둥지둥 악기를 꺼내고 있는 연주자들을 보고 있는 듯하다. 관객들은 모두 힘차고 당당한 서곡이 울리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하기는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오죽하면 위대한 작곡가 베토벤조차 같은 오페라의 서곡을 여러 번 다시 작곡해야 했을까. 오페라는 하나인데 베토벤의 ‘레오노레 서곡’이 네 개나 남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음악의 시작도 중요한데 인생의 시작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음악이야 잘못된 서곡을 고쳐 쓸 수도 있지만 인생을 다시 돌이켜서 쓸 수는 없지 않은가. 륄리의 경우처럼 예술에서는 가끔 비뚤어진 출발이 의외로 기대하지 않았던 괜찮은 결과를 낳기도 하지만, 인생에서 잘못된 출발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일은 단연코 없다. 그런 점에서 시작은 진지한 성찰과 준비를 필요로 하는 엄중한 일이기도 하다.
자신의 인생을 위해 어떤 서곡을 준비할 것인가. 산뜻하고 밝게 출발하려면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서곡’이 제격이다. 불필요한 소리는 단 하나도 없이 깔끔하기 그지없다. 처음부터 청중을 압도하고 싶다면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만 한 것도 없을 것이다. 축제 같은 출발을 원하는가? 시작부터 트럼펫의 힘찬 팡파르가 울려퍼지는 주페의 ‘경기병 서곡’이 압권이다. 아니면 분위기를 바꾸어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곡’처럼 비장하게 시작하는 인생도 멋있을 것 같다. 비극이면 어떤가? 항상 희극만 있는 인생은 없는 법이니까.
새봄, 새 출발의 막이 올랐다.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다. 긴장되고 떨릴지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만의 서곡을 용기 내어 연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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