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트렌드 vs 클래식]에미넴과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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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김경의 트렌드 vs 클래식]에미넴과 이정희

김경 | 칼럼니스트


 

폭설이 내린 다음날 아침은 유난히 고요했다. 하얀 눈이 이 세상의 모든 더럽고 어둡고 추악한 것들 위에 조용히 내려앉아 소담스럽게 쌓여 있었다. 그 길 위를 자동차로 달리며 오랜 만에 에미넴(EMINEM)을 들었다. 특유의 복잡하고 록적인 라임 덕분에 섬뜩한 욕설이 시(詩)처럼 날아와 가슴에 꽂혔다. “우린 끊임없이 불평할 거야. 난 사고 수습 같은 거 안 해. 날 죽이는 게 좋을 걸. … 해서는 안될 말을 서슴없이 랩을 통해 입 밖에 내뱉은 죄로. … 난 악마의 사진을 팔기 위해 사진을 인화하는 중이지. … 일부러 널 모욕할 거다. 니들은 나한테 걸레에 지나지 않아.” 에미넴이 숨을 들이마시거나 내쉴 때마다 내 폐 속의 공기가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속이 시원했다. 후련했다.


가수 에미넴 (경향신문DB)


여기저기서 2012년 우리의 대중문화계를 홍수처럼 휩쓴 키워드 ‘19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지 드래곤은 지난 9월 앨범 <원 오브 어 카인드>를 내며 스스로 ‘19세 미만 청취 불가’ 등급을 달았고, 성인들이 들을 만한 야시시한 가요를 표방한다는 남성 듀오 십센치(10㎝)도 비슷한 시기 2집 앨범을 내면서 아예 “앨범 전곡을 19금 곡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뜻대로 잘되지는 않았다”며 아쉬움을 전했다. 하지만 에미넴에 비하면 내가 듣기에 다 애들 장난 같다. 가장 야하다는 10㎝의 노래 ‘오늘밤에’조차 스스로 문제 되는 단어(“외로운 밤 슬쓸한 이 밤에/ 놀아줄 여인 하나 없이/ 삐걱대는 만실 여관방엔/ 다 Everybody fuck tonight”의 ‘fuck’)를 지운 클린버전 덕분에 시들해졌다. 19금 콘텐츠라면 에미넴처럼 무엇보다 금기를 깨고 정곡을 찌르는 통쾌한 카타르시스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 그나마 성인을 위한 코미디를 표방하는 tvN의 <SNL 코리아>가 단지 선정적이거나 노골적인의 수위의 야한 농담뿐만 아니라 정치인들에 대한 ‘성역 없는 풍자와 조롱’를 담고 있어서 반가운 정도고. 


2000년 욕설과 험담으로 가득한 에미넴의 앨범 <The Marshall Mathers LP>가 발표된 해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에미넴에게 ‘올해의 대중예술가 1위’를 헌정했다. 그 선정이유는 “그의 거친 입이 보수적인 팝계의 고정관념에 도전했으며, 그 강도 높은 험담은 대중이 받아들일 수 있는 보통선의 한계를 한 단계 높여 놓았다”는 것이었다. 사실 어디 욕과 반항, 분노 어린 광기를 통해 우뚝 선 뮤지션들이 한둘이었겠는가. 그들은 더 세고, 더 적나라하며, 더욱 노골적인 조롱과 분노를 기반으로 성장해 나간다. 대중이 뭔가 욕구 불만에 질식할 것 같지만 미처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할 때 그들은 신나는 리듬과 함께 쭈뼛거리지 않고 할 욕을 다 하는 것이다. 엿 같은 세상에 대한 분노와 조롱을 여과 없이 담아낸 음악들이 설사 상업적이라거나 얼치기 같다고 비난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표현의 자유란 무엇인가’를 고민해야만 하는 우리들로선 사실 그저 부러울 뿐이다.


그러고 보면 지난 몇 년간 가장 후퇴한 문제가 언론의 독립과 자유였다. 방송을 장악한 MB 정권이 국민의 알 권리를 무시하고 자기들 유리한 대로 뉴스를 내보내고 있다. 그에 저항한 양심 있는 수많은 기자와 PD들이 보복 인사를 당했다. 결국 MBC 같은 경우 ‘싸장님’이 심어 놓은 아마추어들이 방송을 만들고 있고.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대한민국 국민의 몇 퍼센트나 될까? “아, 어쩐지 MBC가 이상하더라고. 당선 무효형 받은 새누리당 김근태 의원 소식을 전하며 고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의 사진을 자료 화면으로 올리더라고. 쟤들이 미쳤나 했어. 방송을 발가락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강원도로 이사온 후 친하게 지내고 있는 지인의 말이다. 심지어 텔레비전 없이 못 산다며 종종 <개그 콘서트>의 한 장면을 재연해주며 술자리를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전직 방송작가 이웃도 있는데 그 역시 언론사들의 장기 파업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통합진보당 이정희 전 대표 대선출마 선언 (경향신문DB)


이런 와중에 TV토론에서 이정희 후보의 직설화법이 없었다면 대부분의 국민들이 다카키 마사오의 존재도, 전두환에게 받았다는 6억원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 채 투표장에 갔을 거다. 이 땅의 방송 언론들이 마땅히 밝혀주어야 했지만 권력 눈치 보며 감추기 바빴던 역사적 진실을 이정희 후보가 한 방에 증명한 쾌거였다. 놀랍게도 그 다음날 실시간 검색어 1위가 바로 다카키 마사오. 마치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보란 듯 침을 뱉는 그 당당함에 조금은 놀랐고, 약간 부러웠고, 무엇보다 시원했다. 그녀는 맞아 죽을 각오로,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며, 자기가 하고 싶고, 해야 하며, 할 수밖에 없는 말을 했다고 난 생각한다. 그런 점이 꼭 에미넴 같다. “난 두렵지 않아. 당당히 맞서기 위해 모두 내 손 잡아. 우린 함께 이 길을 걸어갈 거야. 태풍을 뚫고…. 날씨는 상관 마. 춥든 덥든 간에 그냥 이걸 알려주려고. 넌 혼자가 아냐. …그러니까 네 감정은 XX라 그래. 네 머리에 왕관이 올려지는 거 대신 똥을 얹어주지”라고 노래했던 에미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