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지상파 예능 프로그램의 변신
본문 바로가기

TV 블라블라

[문화비평]지상파 예능 프로그램의 변신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다. 젊은층들이 종종 <마리텔>이라 줄여 부르곤 하는 이 프로그램은 7~8% 정도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선전 중이다. 시청률만 보자면 30%를 무시로 넘곤 했던 10여년 전 <개그콘서트>와 비교하는 것이 가당치 않고, 요즘의 방송환경을 고려하더라도 <마리텔>을 올해 상반기 ‘최고 인기’ 프로그램이라 말하기는 좀 쑥스럽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이 눈에 띄는 이유는 따로 있다. <마리텔>은 지상파 방송사의 더딘 현실 인식과 위기감을 반영한다. ‘거실 텔레비전’의 시대가 저물어감을 보여준다. 더불어,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이 사회가 어떤 모습인지까지도 슬쩍 보여준다.

텔레비전이 노년층의 미디어가 되었다는 사실은 여러 조사를 통해 거듭 확인된다. 텔레비전이 생활에 꼭 필요한 미디어라고 답한 세대는 50대 이상에 제한됐고, 젊을수록 텔레비전 시청 시간은 꾸준히, 그리고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그렇다고 30대 이하가 텔레비전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안 보는 것은 아니다. ‘본방 사수’를 하는 경우가 많지 않고, 텔레비전 수상기 대신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로 볼 뿐이다. 그런데 왜 텔레비전이 위기라고 말하는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에는 경쟁자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스마트 기기에는 언제든 접근 가능한 미드, 영드, 일드가 수두룩하고, 취향에 딱 맞는 웹툰, 배꼽을 잡게 하는 소위 ‘짤’들, 스포츠 하이라이트 등이 넘쳐난다.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의 경쟁 상대는 수백만개가 넘는다.

<마리텔>은 드디어 지상파 방송사가 현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같은 지상파는 물론 tvN, JTBC 등 케이블채널도 아닌, 유튜브와 아프리카TV가 경쟁자임을 인정한 첫 결과물이다. 50대 이상의 확장성 없는 시청자군을 포기하고 30대 이하의 본진으로 쳐들어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카메라 한 대 세워놓고 어설프게 진행하는 저질 아마추어 방송으로 매도하던 1인 텔레비전 방송을 진지하게 벤치마킹한 겸손한 기획이다. 게임의 BGM을 그대로 쓰고, ‘별풍선’ ‘방송천재’ ‘노잼’ ‘천상계’ 등의 용어들이 난무한다. 결과도 나쁘지 않다. 시청률도 꾸준히 오르고, 동시간대에서는 계속 시청률 1위를 기록 중이다.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하 마리텔)은 음식사업가이자 셰프인 백종원씨 (출처 : 경향DB)


지상파 3사가 케이블채널의 프로그램들을 슬그머니 흉내 내기 시작한 것이 불과 5~6년 전이다. Mnet의 <슈퍼스타K>가 선풍적 인기를 끌자 MBC는 <위대한 탄생>을 시작했고, OnStyle의 <도전 수퍼모델 코리아>는 SBS의 <아임 슈퍼모델>로 재탄생됐다. tvN이 <꽃보다 할배>로 인기를 모으자 KBS는 <마마도>라는 유사품을 내놓은 적이 있고, JTBC의 <비정상회담> <마녀사냥>은 각각 MBC의 <헬로 이방인>과 KBS의 <나는 남자다>의 기본 콘셉트를 제공했다. 그러다가 이제 지상파는 전통적인 텔레비전 방송의 범위 밖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마리텔>은 그 시작이다.

그런데 <마리텔>의 가장 큰 성공 요인 중 하나가 ‘쿡방’의 (부분적) 차용이라는 점은 JTBC의 <냉장고를 부탁해(냉부해)>를 연상시킨다. 여느 요리 프로그램과는 달리 일상적 음식, 특히 자취생들이 매력을 느낄 만한 메뉴를 들고 나와 인기를 모으는 것도 비슷하다. 그런데 <냉부해> 역시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든다. ‘생활쿡방’은 1인방송에서 드물지 않게 써먹었던, 그리고 꽤 인기를 모았던 방식이다. 민첩한 케이블 방송사는 다수 시청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기민하게 알아내 상품으로 만들었고, 지상파 방송사는 이제야 비로소 몸을 일으켜 바깥세상을 내다보기 시작한 셈이다.

그렇게 내다본 풍경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다. 육성급 호텔 주방장의 화려한 요리는 재벌가 사랑 얘기 보여주는 드라마처럼 먼 나라의 구경거리로 끝나지만, <마리텔>이나 <냉부해>는 형식도 내용도 지극히 현실적이다. 뻔한 식재료로 짧은 시간 내에 그럴 듯한 음식을 만들어내는 일은 환상을 욕망하게 만드는 대신 현실을 확인하게 한다. 말풍선이 날아다니고 카메라가 삐뚤거리는 <마리텔>이 장수 프로그램의 요소를 갖췄다고 생각되진 않지만, 지상파의 오만을 버리고 일상으로 내려왔다는 점만으로도 이미 성공적이다.

사실 유튜브나 아프리카TV가 텔레비전을 대체하기 시작한 것도 결국 다수가 원하는 콘텐츠를 끊임없이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젊은층의 시청자들이 지상파를 포기하고 케이블채널의 예능 프로그램들을 주목한 것도 ‘작은’ 방송사의 생존본능이 대중의 심리를 더 분명하게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제 ‘공룡’ 방송사가 절박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해법을 ‘오만 버리기’와 ‘소통하기’에서 찾은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가뜩이나 나라의 책임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오만하고 여전히 소통을 거부하는 현실이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윤태진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