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 | 대중문화평론가
꽃미남 원빈을 아저씨라 부르는 역발상으로 성공한 영화 <아저씨>의 전략을 벤치마킹한 드라마가 있다. SBS <신사의 품격>이 그것이다. 네 미남 중년 배우를 전면에 내세운 이 작품은 ‘불혹의 아저씨’에게서 연상되는 기존의 이미지를 배반한 40대 남성 트렌디 드라마를 표방한다. 장동건이 연기하는 주인공 김도진이라는 이름이 원빈의 본명과 같은 것은 작가의 센스다.
남성판 <섹스 앤 더 시티>로 불리는 <신사의 품격>은 이를테면 골드미스터 판타지를 보여준다. 업무의 스트레스와 가장의 무게로 복부비만에 시달리는 아저씨가 아니라 명품 보디를 근사한 수트로 감싼 꽃중년들의 세련되고 쿨한 라이프스타일을 전시하는 드라마란 얘기다.
하지만 그 4인방의 면면을 살펴보면 시대적 맥락과 동떨어진 판타지는 아니다. 도진, 태산(김수로), 윤(김민종), 정록(이종혁)의 나이는 만으로 마흔, 즉 그들은 1972년생이다. 대중문화 최전성기이던 1990년대와 온전히 20대를 함께한 신세대 대표집단. 서태지가 그 선두주자였으며, 장동건과 김민종은 각각 그 시대 트렌디 드라마 열풍을 이끈 <마지막 승부>와 <느낌>의 청춘스타였다.
<신사의 품격>은 이를테면 1970년대 전후에 출생해 1990년대 대중문화를 이끌고 이제 막 40대에 들어선 신세대들의 후일담 판타지다. 현주소가 아닌 후일담 판타지라는 것은, 드라마가 그리는 세계가 40대의 현실보다는 그 당시 신세대가 꿈꾸던 미래의 라이프스타일을 재현한 듯한 가상 우주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SBS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 출연하는 장동건,김수로,김민종,이종혁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l 출처:경향DB
가령 도진은 건축가다. 이 직업에 대한 당시 신세대의 선망은 1990년대를 회고한 영화 <건축학개론>의 서연(수지)의 대사를 통해 단적으로 드러난다. “건축하는 사람 멋있잖아.” 그 선망의 업계에서 인정받은 도진이 전문지 표지를 마치 패션지 모델처럼 장식한 장면은 그러한 성공 판타지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정록도 마찬가지다. 그는 신세대 소비문화 대명사였던 오렌지족 출신으로 그 소비문화의 중심 공간이던 카페의 운영주가 된다. 그리고 그의 카페에 모여 수다를 떨고 서로의 집 비밀번호를 공유하며 명절까지 함께 보내는 네 친구의 모습 역시 그 당시 신세대에게 큰 영향을 미친 <프렌즈>의 또래집단 유사가족 판타지를 구현한 것이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책임져야 할 가족관계가 거세되어 있다. 유부남 정록은 부인보다 친구 혹은 외도 상대와 보내는 시간이 더 많고, 윤은 사별한 상태다. 도진으로 말하자면 “내가 번 돈을 아내 혹은 아이와 나눠 쓰기 싫다”는 이유로 독신주의를 고수한다. 그들은 철저히 ‘나는 나’에 충실했던 신세대가 사회화되지 않고 그대로 ‘나이 든 소년’ 같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신사의 품격>이 ‘불혹의 아저씨’들의 기존 이미지와 만나는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신세대 후일담 판타지로서의 측면이 네 남자의 화려한 라이프스타일로 재현된다면, 그들의 스타일 내면의 자기중심적 사고와 행동은 소위 ‘꼰대’라 불리는 마초 중년 남성의 현실에 더 가깝게 보인다.
담뱃값을 요구하는 10대 앞에서 “학생이 어디서 담밸 펴? 흡연은 폐암 등 각종 질병을 유발” 운운하는 도진, 애인에게 “딴 놈들 앞에서 야한 옷 입지 말라”는 태산, 친구의 외도를 합심해서 변명해주는 의리, 나이까지 속이며 ‘어리고 예쁜 여자’를 찾는 수컷 본능 등 그들의 행동은 기성세대의 구태를 그대로 따른다. 어쩌면 <신사의 품격>은 이미 보수화된 386세대의 뒤를 이어 차츰 보수화되어가는 다음 세대의 현실을 보여주는 드라마일지도 모르겠다.
<아저씨>에서 원빈이 ‘아저씨스럽지’ 않았던 것은 단지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유혹하는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지 않고 어린 소녀와는 위계적 관계가 아니라 고독한 존재로서 동등한 교감을 나누었다. <신사의 품격>이 깨달아야 할 어른의 품격이란 그런 거다. 얼굴이 장동건이라고 다 용서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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