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윤정 | 문화부 차장
베트남 작가 바오 닌을 인터뷰하기 위해 하노이에 다녀왔다. 바오 닌의 장편소설 <전쟁의 슬픔>(아시아)이 국내에 출간됐기 때문이다. 처음 출판사로부터 출장 제안을 받았을 때 좀 의아했다.
이 소설은 베트남전을 그린 작품인 데다 출간 연도가 1991년이다. 1999년 국내에 번역돼 나왔다가 절판됐다. 37년 전에 끝난 다른 나라의 전쟁, 21년 전에 나온 소설, 유일한 장편을 쓴 뒤 칩거하는 작가….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면 ‘이야기가 안되는’ 소재였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한국 시장을 무시할 수 없는 세계적 작가들이 집필 중인 원고를 장별로 쪼개 보내면 번역을 진행해 원전과 거의 동시에 나오는 사례가 심심치 않다.
그러나 지난 10일 바오 닌을 만났을 때 그런 생각이 달라졌다. 그의 작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그의 슬픔 역시 곧바로 주변 사람들에게 전파될 만큼 강력했다. 통역을 맡은 베트남 교포 구수정씨는 바오 닌의 집으로 향하는 동안 전화를 걸어 ‘술을 마시지 말 것’과 ‘외출하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다. 그가 자주 술에 의존하며 대인기피증도 생겼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그가 목격한 살육의 장면이 너무 엄청나서 평범한 인생이라는 궤도로 완전히 돌아오지 못한 것 같았다.
퓰리처상 사진 대전의 네이팜탄 소녀와 그녀를 찍은 AP 통신 닉 우스 기자(1999년) l 출처:경향DB
베트남전은 북베트남군 110만명(추정), 남베트남군 22만명, 미군 6만명, 한국군 50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바오 닌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전쟁의 참상은 익히 알려져 있다. 전쟁이 개인에게 남긴 상처는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즐겨 다룬 소재다. 바오 닌의 소설이 지닌 가치는 잊지 않는 일의 중요성을 일깨운 데 있다. 그는 “전쟁이 끝났을 때 사람들은 승전의 기쁨에 들떠 슬픔이 뭔지 몰랐다”고 했다. 수많은 개인들의 슬픔을 묻어버린 채 과거를 잊고 미래를 건설하자고 한 통일 조국의 폭력성이 슬픔을 기록하는 일로 그를 이끈 것이다.
바오 닌이란 존재가 2012년 한국 독자들과 연결된 데는 과거를 기억하려는 한국 작가들의 노력이 있었다. 소설가 김남일은 1995년 베트남에 처음 갔고, 이듬해 방현석, 김영현, 최인석 등과 어울려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을 만들었다. 이제는 ‘젊은 작가’가 아닌 김남일과 방현석은 이번 여행에 동행해 오랜 친구 바오 닌에게 한국어로 나온 책을 내밀고 그의 어깨를 껴안았다. 이들은 한국이 베트남에 저지른 잘못을 기억하고자 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바오 닌, 바오 닌의 전쟁을 함께 기억해온 한국 작가들 간의 교류가 <전쟁의 슬픔>이란 소설의 먼지를 털어냈다.
과거를 기억하는 일에 관한 한, 통역자였던 구수정씨도 빠지지는 않을 것 같다. 그는 2000년대 초반 국내 한 시사주간지의 베트남 통신원 자격으로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일련의 기사를 썼다. 베트남 ‘도이머이’(개혁·개방) 직후 현지에 건너간 구씨는 월등한 베트남어 실력으로 초창기 우리 기업들의 베트남 진출을 도왔다고 한다. 그러나 양민 학살사건을 들춰내면서 교포사회에서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바오 닌이 처음 만난 ‘외국인 여성’으로 스스럼없는 친구가 된 그녀는 한국에서 오는 여행객들을 바오 닌에게 안내한다. 최근 그녀는 베트남산 캐슈너트를 국내에 공정무역으로 수출하는 일을 시작했다.
바오 닌은 자신이 느꼈던 전쟁의 슬픔을 소설의 문장들 속에 보존했다. 어린 병사들이 밀림에서 흘린 피와 땀, 그들의 공포와 그리움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는 “슬픔은 ‘도이머이’ 할 수 없다”고 했다. 과거를 털어내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과거를 직시할 때만 고통이 해소될 수 있다. 바오 닌의 ‘구식’ 소설을 보면서 소설의 힘은 과거를 정직하게 기억하도록 돕는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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