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찬 | 한국외대 교수·문화연구
<위키드(Wicked)>는 여러 면에서 매우 흥미로운 뮤지컬이다. 우선 <위키드>는 ‘오즈의 마녀들에 대해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라는 부제가 알려주듯이, 우리에게 주디 갈런드 주연의 흑백영화로 잘 알려진 <오즈의 마법사>를 모티브로 하는 뮤지컬이다.
<위키드>가 특히 놀라운 것은 소설과 영화 그리고 뮤지컬과 같은 예술 형식들 사이에 얼마나 다양한 관계 맺기가 가능한지, 하나의 스토리가 예술 형식들을 넘나들며 얼마나 다채롭게 변주될 수 있는지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위키드>는 영화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와 그 원작소설인 <놀라운 오즈의 마법사(The Wonderful Wizard of Oz)>라는 두 원전에 기초해 쓴 ‘평행소설(parallel novel)’을 뮤지컬로 만든 것인데, 말하자면 대중적인 장르인 팬 픽션(fan fiction)에서 곧잘 시도되는 ‘외전(外傳)’을 뮤지컬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인 에어>를 제인의 연인인 로체스터의 미친 아내의 시각에서 다시 쓴 소설이 있듯이, <위키드>는 오즈의 마법사나 캔자스의 시골처녀 도로시가 아닌 오즈의 마녀의 시각에서 풀어나가는 전혀 새로운 이야기다. 이와 같이 평행소설은 오리지널 텍스트에 대한 풍자를 하거나, 대안적인 시선 혹은 새로운 버전의 스토리를 주로 제공한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위키드' l 출처:경향DB
평행소설과 유사한 것으로 ‘매시업 소설(mash-up novel)’이 있는데, 매시업은 좀비 픽션처럼 완전히 다른 장르의 테마나 특징을 등장시킨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즉 매시업은 이미 존재하는 고전들을 현대의 대중적인 뱀파이어나 좀비 이야기와 결합시킨 작품들을 말하는데, 예를 들면 제인 오스틴의 그 유명한 <오만과 편견>을 좀비 장르로의 변주를 통해 <오만과 편견과 좀비들>로 전화(轉化)시켜 여주인공인 엘리자베스 베넷이 좀비들과 싸우게 하는 식이다. 이러한 평행소설과 매시업 소설들은 흥행에서 실패할 확률이 적은 공식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할리우드의 메이저 스튜디오들에 의해 곧잘 영화화되는데, 흥미롭게도 <오즈의 마법사>의 평행소설은 <위키드>라는 뮤지컬로 재탄생한 셈이다.
<위키드>가 이렇게 평행소설에서 비롯된 뮤지컬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우리를 찾아왔지만, 시점과 이야기의 새로움에 비해 그 내러티브 구조는 매우 전통적이며 전형적이라는 점에서 또 한번 놀라움을 안겨준다.
이 뮤지컬은 원전에서 철저히 무시되었던 마녀들의 이야기를 마녀들의 시각에서 풀어나가는 모양새를 취하지만, 사실은 나쁜 마녀(엘파바) 대 좋은 마녀(글린다)라는 철저히 이항대립적인 구도로 내러티브 구조가 짜여 있다. 그리고 그 구조를 관통하는 것은 엘파바와 글린다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이며, 글린다와 피에로와 엘파바라는 세 남녀 사이의 사랑에 관한 담론이며, 엘파바와 네사로즈의 자매애에 관한 이야기다.
이렇게 <위키드>는 전형적인 사랑과 우정과 배신과 가족에 관한 상투성 짙은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놀라운 점은 철저히 여성 중심의 시각과 스토리 전개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남자 주인공인 피에로의 존재감은 크지 않으며, 또 다른 남자 출연자인 보크는 먼치킨이라는 종족으로 왜소한 존재일 뿐 아니라 종국엔 네사로즈의 마법에 걸려 뜨거운 심장도 가질 수 없게 되는 그런 무생물적인 존재다. 글린다의 여성성이 과장된 측면은 있으나 이는 엘파바와 대척점에 있는 캐릭터 구축을 위한 장치가 아니었을까 생각될 정도로 이야기 전개는 철저히 여성들이 주도한다.
마지막으로 이 뮤지컬은 대중문화 형식들에서 특히 공연예술에서 음악이, 청각적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준다. 엘파바의 ‘Defying Gravity’는 <오페라의 유령>에서 크리스틴이 부르는 뮤지컬 넘버들 못지않게 귀에 착착 감기며, 1막의 비감한 클로징을 우리의 영혼에 각인시키려고 작정이나 한 듯 우리의 청각을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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