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시 삼백편을 한마디로 말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는 것이다(詩三百, 一言以蔽之, 思無邪)”라고 했다. 이는 ‘노랫말은 사악함이 없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공자가 말한 ‘시 삼백편’은 <시경>을 말하는데, <시경>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민요이기 때문이다. 공자의 말처럼 노랫말은 인간의 정서를 진솔하게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그 외에 다른 의도가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지금의 노래는 어떤가? 만약 공자가 요즘의 대중가요를 듣는다면 이것은 노래가 아니라며 분노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이윤을 위해 대중을 유혹하고 미혹케 할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노래는 그 자체로 순수하지 않으며 사악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솔한 정서적 표현과는 거리가 있다. 근본적으로는 노래가 산업적 기반 위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진정성을 해친다고 볼 수 있다.
공자의 노래관을 잘 보여주는 또 다른 말은 “즐겁되 음란하지 않고, 슬프되 마음을 상하지 않아야 한다(樂而不淫, 哀而不傷)”는 것이다. <시경> 맨 앞에 나오는 시 ‘관저(關雎)’를 호평하며 나온 이 말은 노래의 전범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노래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도 있고, 슬픔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즐거움이나 슬픔이나 모두 은근해야지, 노골적이면 안된다.
가수 싸이의 뮤직비디오 '강남스타일'의 한 장면. (경향신문DB)
이러한 주장도 오늘날의 노래와 거리가 멀다. 요즘의 유행가는 대개 음란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하고 있는 싸이의 ‘강남스타일’ 중 “지금부터 갈 데까지 가볼까”라는 가사와 말춤이 매우 노골적인 성적 코드를 담고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슬픈 노래도 마찬가지다. 지나의 ‘꺼져줄게 잘살아’처럼 자기 울분을 직설적으로 내뱉는 노래들이 대부분이다.
문화산업 시대의 노래는 ‘자극의 논리’를 따른다. 자극의 논리는 자극이 강할수록 대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번 들으면 곧장 외워버릴 정도로 단순하고 반복적인 후크송이 많아진 것, 가사에 은유와 상징이 사라지고 직설적인 표현으로 가득 차게 된 것, 섹스 어필하는 댄스 음악이 주류가 된 것, 여자 아이돌의 신체 노출 사고가 빈발하는 것 등은 모두 경쟁적으로 자극 투쟁을 벌인 결과다. 가수들은 제도가 허용하는 한계치 최상층부에서 누가 더 자극적인지를 경쟁하고 있다.
모든 예술엔 본래 자극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그래야 관심을 유도할 수 있고, 작품의 메시지를 환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극이 너무 과하면, 예술 본연의 성질이 사라지게 된다. 예를 들어 자극이 센 포르노를 예술이라 부르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예술작품은 감상의 대상이 될 수 있어야 하는데, 과도한 자극은 ‘감상’보다는 ‘반응’을 유발한다. 감상한다는 것은 음미하고 곱씹어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수용자의 주체적인 정신 작용을 요구한다. 그것은 원초적인 감각에 기반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반응과 다르다.
1970~1980년대까지만 해도 음악은 감상의 대상이었다. 그때도 음악은 산업의 기반 위에 있었지만, 자본의 논리가 지금처럼 거세지는 않았다. 음악하는 사람들 중에는 유재하나 김광석처럼 음유시인적 기질을 가진 사람도 많았다. 노랫말에는 시와 마찬가지로 은유와 상징이 적잖이 포함되어 있었다. 노래가 음악감상실에서 음미하고 곱씹어볼 만한 대상이 되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작곡가 김형석의 말처럼 요즘의 노래는 “정서의 차원에서 기획의 차원으로 넘어왔다”. 노래는 더 이상 음악을 만들고 부르는 사람의 주체적 정서를 반영하지 않는다. 노래는 가수를 스타로 만들고, 가수에 대한 팬덤 현상을 조장할 목적으로 기획된다. 거기에는 영혼이 없다. 그것은 자기 소외의 노래다. 음악인의 자기 소외는 다시 수용자에게 확산된다. 영혼이 없는 노래를 부르고, 듣는 시대. 그런 시대를 사는 우리는 불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