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이름이 뭐니?”라는 질문으로 잘 알려진 가수 양희은은 예능프로그램뿐만 아니라 MBC 라디오 <여성시대, 양희은·서경석입니다>를 오랜 시간 지키고 있는 장수 진행자다. 배우이자 그의 동생인 양희경과 콘서트도 갖는 등 전방위로 활동하고 있지만, 양희은이 수많은 금지곡을 지닌 가수라는 것을 젊은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최근 방송된 SBS 예능 <판타스틱 듀오>에서는 수많은 도전자들이 양희은과 함께 ‘아침이슬’을 불렀다. 나이, 직업에 상관없이 ‘아침이슬’을 부르는 장면이 TV 화면에 가득 찼을 때, 감동은 배가되기도 했다. 이렇듯 ‘아침이슬’은 도전과 희망을 이야기할 때 떠올리는 인기가요가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곡이 발표되었을 당시 대중들은 맘 편하게 노래를 즐길 수 없었다. 대중문화에 대한 검열이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971년 김민기가 만들고 양희은이 노래했던 ‘아침이슬’은 가사 중에 ‘태양’이라는 단어가 북한식 인사를 암시한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다. 수많은 가수들이 음반을 낼 정도로 대중적 인기를 지닌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은 발표 당시 정부를 위한 노래 제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음반 자체가 퇴폐로 규정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문화예술인들이 1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예술검열 반대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과거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를 찾아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들로 문화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이 중단되곤 했었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당시의 정부는 다양한 이유들로 검열의 잣대를 들이댔지만, 결국 목적은 하나였다. 권력에 순응하도록 대중을 통제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것이 문화예술에 대한 검열이었기 때문이다. 검열주체의 뒤에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자리했고, 따라서 당시의 검열은 합리적 이유가 아니어도 가능했다. 이렇듯 문화를 통제의 대상으로, 권력의 효율적 통제수단으로만 여기던 시기에 활발한 예술창작활동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시 정부는 정부의 정책과 방침에 반하는 예술가들을 공개적으로 낙인찍고 활동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논리가 정치, 문화, 사회 전반에 팽배했다.
정부의 뜻에 따르지 않는 자들은 모두 틀린 자들이었고, 그들의 생각이 담긴 그 어떤 창작 행위도 이뤄져서는 안되는 것이 됐다.
그럼에도 우리가 다양한 문화예술작품들과 만날 수 있는 이유는 권력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했던 문화예술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상을 반영하는 예술작품의 동시대성, 자유의 소중함 그리고 대중에게 희망을 전하고자 했던 예술가들의 진정성이 작품에 담겨 있었기에 과거 검열의 대상이었던 작품들이 지금까지도 큰 인기를 끄는 것이라 생각된다. 더 나아가 논란의 대상으로 고통받았던 문화예술작가들과 작품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문화예술 환경이 구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문화예술계는 검열논란에 휩싸였다. 지난 10일 도종환 의원이 밝힌 블랙리스트 논란이 그것이다. 정치인의 발언 이전에,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들로 공공지원을 받지 못하는 예술가들이 늘어나면서 예술가들이 느끼는 블랙리스트 존재에 대한 의심은 더욱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만약 이 발언이 사실이라면 정부는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즉 자본의 논리로 문화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막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이를 반드시 증명해야 한다.
블랙리스트의 존재 여부는 그 논란만으로도 한국사회의 문화예술적 기준을 가늠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포크 가수 밥 딜런이 노벨 문학상을 탄 지금, 국내 문화예술계의 블랙리스트 의혹과 논란은 우리 모두를 씁쓸하게 만든다. 그는 반전, 평화, 인권 등의 내용을 담은 노랫말을 통해 전 세계인에게 공감을 이끌어낸 가수이며, 그러한 밥 딜런의 음악활동이 세계 평화를 지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는 것을 인정받은 것이 노벨 문학상 수상이다.
밥 딜런은 문학인이 아님에도 노벨 문학상을 거머쥐었고, 대중의 소통과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문화예술의 역할임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 것이다. 문화예술가들의 창작은 대중에게 삶의 지표를 제공한다. 대중을 위로하고 사회변화와 발전에 큰 동력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창작활동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대중에게 다양한 문화예술작품의 향유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배제와 억압이 아닌 자유로운 토론의 ‘장’을 만드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옳고 그름이라는 기준으로 문화예술작품을 판단할 수도 없을뿐더러, 문화예술작품의 가치를 향유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국가가 아닌 대중의 몫이다.
이종임 |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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