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다못한 한 기자가 자판을 두드린다. “국장이 싫어하지 않을까, 부장에게 찍히지 않을까 눈치를 보는 보도국”임을 한탄하고, “반발하는 기자들을 징계하고, 저항하는 기자들을 쫓아내고, 마음에 안 드는 기자들의 입을 틀어막은” 이들을 비판하며, 보도국장의 퇴진을 명시적으로 주장한다. 사흘 전 MBC 보도국 게시판에 실명으로 올라온 글이다. 또 다른 MBC 기자는 뉴스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라는 말조차 못 쓰게 했던 보도국의 분위기를 고발한다.
세월호 참사가 있었을 때, 당시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은 KBS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해경에 대한 비판보도를 중지하라고 다그친다. 대통령이 KBS를 봤다며 압박을 한다. 그 녹취록이 공개된 것이 지난 6월이다. 청와대는 흔들거리고 KBS는 발칵 뒤집힐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 문제의 홍보수석은 불과 40여일 후 여당의 대표로 당선되었고,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이 사건을 따지려 하자 KBS 사장이라는 자는 답변석의 보도본부장에게 “답변하지 마!”라고 지시를 한다. 그렇게 뻔뻔스럽던 KBS 뉴스는 요즘 노조의 표현을 빌리자면 “종편 베끼기에 급급한 상황”이다.
언론노조가 이정현 전 홍보수석과 김시곤 KBS 전 보도국장의 통화 내용을 공개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지금의 참담한 나라꼴을 목도하면서, 조심스럽게 질문을 한다. 사과해야 할 사람이 대통령뿐인가? 대통령만 물러나면 정말 세상이 바뀔까? 대통령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했던 언론은 그 책임에서 자유로운가? 소위 ‘공영방송’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공익’을 위한다는 KBS와 MBC는 그동안 무슨 일을 했는가? 혹은 안 했는가?
‘민주언론시민연합’의 모니터링 결과에 따르면, 10월17일부터 사흘 동안 KBS와 MBC의 최순실 관련 보도는 각각 4건과 1.5건에 불과했다. 같은 기간 JTBC는 30건, TV조선은 14건이었다. 10월20일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이라는 이름은 거론하지 않은 채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면 엄정히 처벌받을 것”이라고 발언하자, KBS와 MBC는 갑작스레 최순실 보도를 늘리기 시작한다. 나흘 동안 각각 10건 이상의 관련 보도를 내보냈다. 그리고 24일, 대통령이 개헌 추진 선언을 하자 다시 최순실 이름은 쑥 들어가고 개헌과 ‘정국 돌파’ 이야기로 저녁 뉴스를 채웠다.
JTBC의 태블릿PC 특종과 함께 ‘최순실 게이트’가 본격화한 것도 10월24일이었다. 다음날 대통령이 90초짜리 사과를 발표하자 거의 모든 신문과 방송이 대통령의 무성의와 무책임을 비판했지만, 유독 MBC 뉴스만은 대통령의 ‘결단’을 칭송했다. 불과 두 주 전 방송이지만, 지금 다시 보면 손발이 오그라들어 차마 기자 리포트를 듣고 있기 어렵다.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에 따르면, 최순실 관련 보도가 처음 건의되었을 때 보도국장은 “어떻게 측근이라고 장담할 수 있나”라며 묵살했다고 한다. 한 달 전 ‘최순실 비리 의혹’에 관한 전담팀 구성을 요구했을 때에는 ‘특정 정치세력의 정략적 공세’라며 무시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하야가 언급될 만큼 상황이 바뀐 이후에야 부랴부랴 전담팀을 구성했다.
MBC의 미래전략본부장이 극우 인터넷 언론사 대표와 나눈 대화의 녹취록이 지난 3월 공개되었다. 파업에 참여한 PD와 기자를 증거 없이 해고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2년 전 대화였다. “해고시켜 놓고, 나중에 소송 들어오면 그때 받아주면 될 거 아니냐”는 발언도 있었다. 중소기업의 인사부장 발언이었다면 난리가 났음직한 내용이지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 공영방송의 책임자들은 아무런 문제의식도 반성할 의향도 없었다.
이런 조직들이 그동안 만든 뉴스가 어떻게 정상적일 수 있겠는가. 어느 날 갑자기 번지점프하듯 추락한 것이 아니다. 세월호 보도로 신망을 잃은 후, 혹은 홍보수석이 뻔뻔스럽게 압력을 가했던 때부터 이미 KBS 뉴스는 쓰러지고 있었다. 눈에 거슬리는 베테랑 기자들 맘대로 자르고 유배 보내던 시절부터 MBC 뉴스는 이미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증거 없이 해고되었던 당사자인 박성제 기자는 “KBS는 재갈이 물려 있고, MBC는 이빨이 뽑혀 있다”는 표현으로 지금의 공영방송을 간단명료하게 정의한다. 공영방송이 재갈 물리고 이빨 뽑히는 동안 깊은 눈길 주는 데에 인색했던 국민들은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대통령이 못마땅한가? 감시견부터 바꿔야 한다. 공영방송부터, 아니 공영방송이라도 정상화되어야 한다. 먼저 사과하고 물러날 사람은 KBS의 고대영 사장과 MBC의 안광한 사장이다.
윤태진 |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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