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나머지’를 구매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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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문화비평]‘나머지’를 구매하는 세상

마르크스가 쓴 <자본>에는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 많다. 누군가 아이러니의 대가로서 마르크스를 발견해 그가 가진 글 솜씨에 관한 책을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만큼 그는 구변이 좋다. 아무튼 <자본>이란 책에서 내가 좋아하는 구절 가운데 하나는 이런 것이다. “상품은 언뜻 보면 자명하고 평범한 물건처럼 보인다. 그러나 상품을 분석해보면 그것이 형이상학적인 교활함과 신학적 변덕으로 가득 찬 매우 기묘한 물건임을 알게 된다.” 언뜻 읽으면 그저 그런 말처럼 들리지만 곱씹어보면, “어쩔!”이란 속된 감탄이 절로 나온다.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우리의 상식과 정반대되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흔한 믿음대로라면 근대 사회란 형이상학의 독단이나 비합리적인 신학의 굴레에서 벗어난 세계를 가리킨다. 어둠에서 벗어나 빛을 밝힌 계몽의 시대를 근대라 부르지 않던가. 그렇지만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라는 세계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세포이자 그것을 응축하는 작은 대상인 상품을 두고 형이상학과 신학을 들먹이고 있다.



그런데 대관절 왜 그는 상식에 어긋나는 주장을 하는 것일까. 그러나 우리 시대의 풍경을 훑다보면 그의 생각은 더없이 적절하게 들리지 않을 수 없다. 알다시피 사람들은 부지런히 자신의 휴대전화를 2년에 한 번 아니 빠르면 1년에 한 번꼴로 바꾸는 게 습관이 되었다시피 한다. 또 계절마다 새 청바지나 운동화를 산다. 그런데 실은 새로 산 휴대전화에서 내가 사는 것은 그것이 최신의 것이라는 점이다. 새로움? 그것은 그저 형이상학적인 관념일 뿐이다. 내가 새 청바지와 운동화를 살 때 내가 정작 사는 것은 놀랍게도 “간지”라는 미학적인 관념이다. 하물며 내가 “오가닉 코튼”으로 제작하고 염색에 가능한 한 물을 적게 써 만든 바지를 산다면 나는 “선(善)”이라는 윤리적 가치까지 사는 셈이다. 결국 새 청바지와 운동화를 살 때, 우리가 사들이는 것은 바로 그런 형이상학적인 관념이다.


 

리바이스 에코 청바지 (경향신문DB)



불과 얼마 전 시장의 쌀집에 가면 널따란 멍석 위에 쌓여 있는 쌀 위로 작은 팻말이 꽂혀 있고,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곤 했다. “쌀.” 그러나 이제 대형마트에 들렸을 때 우리는 쩔쩔매지 않을 수 없다. 그곳에는 온갖 이름을 단 “이런저런 쌀”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그래, 이게 좋겠다”고 집어 들 때, 우리가 선택한 것은 그것을 다른 무엇으로 만들어주는 바로 그것. 추가적인 X, 어떤 형이상학적인 관념(생태적 가치, 전통이라는 관념 등) 따위에 불과하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야말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는 우리 시대의 미덕이라고 너스레를 떨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에게 이렇게 대꾸하는 일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네 맞습니다. 단, 쌀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만 빼고요.” 실은 여분의 X라는 무엇을 선택할 뿐 우리는 영원히 쌀을 선택할 수 없다. “간지”만 입을 뿐 청바지를 입을 수 없게 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선택의 자유는 실은 진짜를 선택할 자유는 빼고, 나머지를 선택하는 것 아닐까. 그 나머지가 진·선·미라는 온갖 가치를 뒤집어쓸지라도 말이다. 마르크스가 말한 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 상품의 정수는 명품일지도 모른다. 오직 유명 브랜드란 것만으로 높은 가격에 팔리는 상품. 그래서 나는 모두들 환장한다는 엄청난 가격의 칙칙한 흑갈색 프랑스산 백에 박혀 있는 로고를 볼 때마다, 그것이 형이상학적 상품의 정수일 것이란 생뚱맞은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물론 이는 약과이다. 오늘 펼친 신문에 나온 저 수많은 노후 설계 금융상품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신학적 광기 아닐까. 더 이상 어떤 물질적 신체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신비한 가치의 자기증식. 돈이 돈을 낳는 것이라는 이 미친 믿음 말이다. 그렇게 보면 자본주의는 그 어느 때보다 신학적 궤변과 형이상학적인 잠꼬대를 통해서만 돌아가는 세계인 것도 같다. 역시, 우리는 아직 계몽이 덜 된 셈이다. 계몽을 위하여 앞으로!



서동진 | 계원예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