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에세이]봄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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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정동에세이]봄의 투쟁

봄비가 내리고 얼마 후면 봄-소리가 들려온다. 저만치에서 트랙터가 흙을 뒤집으며 경작을 준비하는 소리다. 봄을 맞은 산의 색은 단정하다. 앉은부채의 초록과 진달래의 연분홍과 하늘의 파랑! 생강나무 군락이 있는 숲 비탈에서 노란 꽃들을 땄다. 봄 산에서 가장 먼저 피는 생강나무 꽃으로 차를 만들어 마시기 위해서다.



생강나무와 생강의 관계는 국수나무와 국수의 관계와 비슷하다. 생강나무에는 생강이 맺히지 않고 국수나무에선 국수가 뽑혀 나오지 않는다. 세상엔 이와 같은 관계의 말과 일이 얼마나 많은지 되새기며 꽃을 따러 나무 사이를 옮겨 다녔다. 그날 저녁, 낮에 딴 생강나무 꽃을 살짝 데쳐 탁자 위에 나란히 뉘어놓고 말렸다. 밑에 깔린 하얀 종이에는 노란 물이 배어 나왔다. 벚꽃이 눈처럼 날리는 날에는 물푸레나무에 기대어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 본다. 비가 흩뿌리는 날에는 젖어 가는 산의 빛깔을 창 사이로 숨죽인 채 훔쳐본다. 첫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들려온 저녁엔 괜히 달뜬 마음에 동네 호프집을 찾아 축하주를 마신다.

 


서울에서 조금만 비켜나도 이렇게 한적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서울 안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요가 있다. 그 고요 속에 몸을 맡기면, 저 높은 트레르가스타인에 들어간 아르네 네스처럼 살지 않아도 하늘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고, 저녁마다 빨간 벽돌을 더 붉은 햇살이 물들이는 세상의 신비를 엿볼 수 있다.






들풀이 자라고 양털이 자라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는 하임달의 청력을 갖진 못했더라도 우리가 사는 동네와 집 주변이 생명에 경탄한 기회들로 가득차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바싹 마른 빨간 고추열매를 흙에 놓아주면 싹을 틔운다. 몸통이 잘리고 뿌리만 남은 대파에게 흙이나 물을 돌려주면 다시 자란다. 허리가 잘린 고구마가 무성하게 잎을 피우는 데에 필요한 것은 물이 담긴 작은 그릇뿐이다. 양파와 마늘 한 조각에게도 다시 기회를 주면 록 가수의 풍성한 머리카락 같은 줄기와 뿌리가 뻗는다. 잡곡으로 일생을 마감할 뻔한 서리태도 흙만 만나면 쑥쑥 자라 자손을 퍼뜨린다.



대개의 사람들은 일단 대도시에 발을 들여 놓으면 벗어날 수 없는 이유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집값이 비싼 지역에 살다가 그 밖으로 밀려 나기라도 하면 자신이 ‘짐마차를 끄는 페가수스’의 처지라도 된 것 같아 두려워한다. 휴가철 유명 관광지에서 무엇부터 봐야 할지 두리번거리는 습성은 이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모습과 닮았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면서, 남들이 가니까 나도 가야 한다…, 그러다 보니, 내 삶은 사라지고 열심히 남의 삶을 살아가는 아이러니를 보게 된다.



1982년에 800원을 주고 산 <명심보감>에는 ‘생사사생 성사사성(生事事生 省事事省)’ 즉, 일을 만들면 일이 만들어지고 일을 덜면 일이 덜어진다는 말이 있었다. 나로 하여금 나 없이도 세상은 잘 돌아가며, 그렇기에 자신의 의미는 다른 데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할 시간은 필요하다. 남보다 앞서야 하고, 어떤 경우에도 이겨야만 하는 자는 반드시 적을 만난다는 ‘호승자 필우적(好勝子 必遇敵)’에도 밑줄이 그어져 있다. 애초에 용서할 일이 적은 삶이면 좋겠지만 어디 그러한가. 더욱이 이기지 못하면 죽어야 하는 세계가 이즈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아닌가? 산은 죽음 속에서 삶이 피어오르는 곳이다. 흔히 봄 앞에 ‘만물이 소생하는’이란 수식을 붙이지만, 겨울의 차가운 침묵 아래 ‘소생’을 위한 힘겨운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작은 벌레들은 깨어나 아무도 몰래 집을 짓고/ 주어진 만큼의 날들을 위해 힘을 다해 싸우네”라고 노래한 ‘봄’은 싱어송라이터 이장혁이 2008년에 발표한 <이장혁 Vol.2>에 실린 곡이다. 벚꽃이 바람에 날리고 스러져갈 무렵, 어딘가에 앉아 생각을 멈추고 바람을 맡으며 듣기에 좋다.



꽃은 꼭 열매를 맺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름답다지만, 새봄이 오기 전까지 뿌리 한 가닥 내릴 흙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차례로 벚꽃처럼 스러져 ‘모란꽃 피는 공원’으로 가야 했다. 그들이 보지 않겠다고 숨을 돌려버린 봄날을 우리는 살고 있다. 지금도 산에서, 도시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봄을 위한 투쟁(春鬪)’은 계속되고 있다. 어떤 이들에게 봄은 마냥 기다린다고 절로 돌아오는 계절이 아니다. 봄은 봄이되 봄이 아니다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따스한 봄 기운이 천지를 적시고, 만물이 소생하는 진정한 봄은 정말 요원한 것일까?



나도원 |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