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문자로 온 후배 B의 부음을 접하고 이 이름이 내가 아는 그 이름인가 싶어서 처음엔 의아해했고 그 다음엔 아득해했다. “아니 그 아이가 왜?” 아직 마흔도 안됐거나 이제 막 마흔이 됐을 나이다. 담배는 피우다 안 피우다 했던 것 같은데 술은 거의 안 했다. 남자들 세계에서 마흔의 과로사는 흔한 일이지만 그 아이는 여자다. 게다가 결혼도 안 한 처자의 몸. 그런데 느닷없는 뇌출혈이라니.
천국에서는 모두 낮잠을 잔다고 들었다. B도 지금쯤 낮잠을 자고 있을까? 그 애의 깡마른 몸이 생각난다. 나태함을 아예 모르거나 처음부터 아예 추방한 몸처럼 보였다.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서도 늘 가볍게 움직이던 몸. 그리고 거의, 언제나, 인디언 소녀처럼 야무진 그 얼굴엔 개구쟁이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늘 성실하고 명랑하게 일했고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물을 주기 위해 며칠씩 철야작업을 하며 군말 없이 최선을 다하는 포토그래퍼였다. 그 때문인지 유독 그녀가 아니면 안된다는 식의 요구를 잡지사에 전달하는 연예인들이 유독 많았다. 하지만 나로서는 왠지 안쓰러워서 만나면 늘 비슷한 잔소리를 해대곤 했다. “야, 일만 하지 말고 제발 연애 좀 해. 그 젊고 창창한 몸이 아깝지도 않냐?” 그랬더니 한 번은 그녀가 이런 고백을 했던 기억도 난다. “저희 언니들은 모두 일찍 시집가서 아기 낳고 잘 살고 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둘째 언니가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넌 네가 멋져 보이지? 난 네가 불쌍해 보여’. 저, 그때 엄청 충격 받았어요.”
(경향DB)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 때 내 꿈은 ‘커리어우먼’이었다. 직업이 뭐가 됐든 여하튼 결혼보다는 일로 승부하는 여자가 되고 싶었다. 수시로 커피를 마셔가며 늦게까지 치열하게 일하다 밤 늦게 하이힐을 신고 퇴근하는 여자. “스스로를 부양해야 진정 자유로울 수 있다.” 그게 대학교 여성학 강좌를 통해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만났던 우리 세대 여자들의 모토가 아니었을까 싶다. 경제적으로 남성에게 의지하는 여성은 아내든 정부든 실질적인 권리를 부리지 못하며, 남자에게 종속된 그야말로 기생충 같은 존재라는 보부아르 여사의 경고가 어찌나 살벌하고 무시무시했던지 하늘이 두 쪽 나도 일로 나 자신을 증명하는 일부터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 때문에 잡지사 기자가 되어 누적된 피로와 스트레스를 참지 못하고 모니터를 창밖으로 던지고 싶다거나 출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했으면 좋겠다는 충동이 들 때마다 진지하게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를 고민해야만 했다.
그러다 5년차쯤 됐을 때 알았다. 일이라는 게 자아실현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필요악 같은 것이라는 걸. 러셀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책을 통해서 “내가 진심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이 현대사회에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과 번영에 이르는 길은 조직적으로 일을 줄여가는 일이다”라고 했는데 정말로 그걸 읽고서야 간신히 자살 혹은 실종(어디론가 아무 의무도 없는 곳으로 뿅 사라지고 싶은) 충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회사 다니면서 틈나는 대로 농땡이를 부리고 맘껏 호기심을 탐닉하며 내 자신의 본능에 충실해 일보다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에 더 가치를 두기 시작한 건.
요즘은 상황이 더 나빠졌다. 직업적 안정이나 성공은 고사하고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경제적 자립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돈을 벌기 위해 결혼이나 출산은 물론 연애까지 포기한 젊은 세대가 많은 걸로 안다. 그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타인의 일기장이 있다. 현대 미술계의 슈퍼스타였던 앤디 워홀의 일기다. 살아생전 비틀스만큼 잘 팔렸고 또 그만큼 유명했던 그가 죽기 6년 전인 1981년 4월17일(금요일)에 썼던 일기. “6시30분까지 일했다. 루퍼트가 블리커가에서 함께 있었던 남자들을 파티에 초대했지만 너무 우울했다. 레스토랑 브라세리에서 식사를 했다($40). 아무도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서 기가 죽어 쓸쓸하게 집으로 갔다. 부활절. 울었다.”
죽는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아인슈타인은 더 이상 모차르트를 듣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멋진 말이다. 하지만 내게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더 이상 들여다볼 수 없고 같이 뭔가 먹거나 음악을 들으며 웃음을 터트릴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빅토르 위고가 말했듯이 ‘인생에 있어 최고의 행복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다. 그런 확신 속에서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짧은 생애 동안 외롭지 않게 찬란하게 살면 좋겠다.
김경 | 칼럼니스트
'대중문화 생각꺼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기 극복 ‘나눔 문화’에서 길을 찾자 (0) | 2013.05.02 |
---|---|
[문화비평]‘나머지’를 구매하는 세상 (0) | 2013.04.29 |
[문화와 삶]‘아름다운 방’들이 넘치는 신세계 (0) | 2013.04.16 |
[문화와 삶]교과서에 한자 쓰자는 사람들 (0) | 2013.04.11 |
[공감]슬프고 무서운 사람들 (0) | 2013.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