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칼럼]‘황금의 제국’ 가족 신화의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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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칼럼]‘황금의 제국’ 가족 신화의 해체

요즘 오랜만에 TV 시청이 기다려지는 드라마가 있다. 바로 SBS에서 방송하는 <황금의 제국>이다. 제목만 보고 뻔한 기업 드라마라고 생각했지만 중간 회차 즈음 우연히 이 작품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우선 한국의 드라마 지형에 비춰 독특한 극 전개를 하고 있다. 1980~1990년대 급성장한 부동산 재벌을 배경으로 재벌의 부도덕한 행태 때문에 아버지를 잃은 어린 소년이 복수를 다짐한 후 사회적으로 성공한다는 점에서는 전형적인 기업 드라마의 공식을 따른다. 양념처럼 주인공의 로맨스도 섞여 있다.


 


하지만 이 두 개의 얼개를 빼놓고는 기존 드라마의 문법을 거부하고 있다. 남자 주인공은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여느 주인공처럼 정의롭지도 도덕적이지도 못하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범법 행위를 저지르며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재벌의 행태를 되풀이한다. 로맨스 역시 사랑하는 여인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흑기사 이미지보다는 필요에 따라선 사랑을 무기로 삼아 자신의 살인죄를 여인에게 뒤집어씌우는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낸다.




또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매회 달라지는 빠른 속도감과 바로 직전 대사를 듣지 못하면 다음 대사가 이해되지 않는 주인공들의 대화법 등은 느린 호흡과 열번, 스무번 비슷한 상황을 친절하게 설명하며 권선징악적 주제를 강조하는 일일드라마와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작품이 무엇보다 인상깊은 것은 바로 자신의 결핍과 욕망을 끊임없이 상대방에게 소구하는 가족의 모습이다. 외환위기를 거치고 신자유주의 가치가 확산되면서 가족 같은 직장은 더 이상 없지만 <황금의 제국>에선 가족이라는 최후의 집단에서조차 욕망에 따라 구성원들이 이합집산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혹은 아버지처럼 살지 않기 위해 등의 ‘명분’은 허울일 뿐 혈연을 나누거나 결혼으로 맺어진 가족들은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내보이며 상대방의 것들을 뺏어오기 위해 안달이 나 있다.


이 모습을 보며 과연 가족은 언제까지 서로에게 축복이자 최후의 안식처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은 현대사회에는 사회적 지위나 재산에 집착하는 사람들, 소위 ‘속물’들이 많아 현대인들의 불안이 야기된다며 속물의 반대는 바로 대가없이 희생하는 ‘어머니’, 즉 가족이라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가족 간에도 “서류가 보증이요, 돈이 약속”이라는 주인공의 대사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면서 이제는 가족에게 조건없는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그저 뻔뻔한 요구가 아닐까 하는 회의감이 밀려온다.





문주영 전국사회부 기자 mooni@kh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