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에세이]내가 커피숍을 사랑하는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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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정동에세이]내가 커피숍을 사랑하는 사연

‘Family is not a word. Family is a sentence.’ 어느 할리우드 영화의 광고 문구입니다. ‘family는 단어가 아닙니다. family는 문장입니다’라는 뜻이지요. “아니, ‘family’는 분명 단어인데 단어가 아니라니?! 게다가 문장이라니?!” 단박에 그런 궁금증이 생기지 않는지요? 가족이 문장이라는 은유는, 여러 개의 단어가 모여 하나의 완전한 문장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과 딸 등 식구가 다 모여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룰 때 비로소 그 가족은 완전한 문장처럼 완성된다는 뜻이지요.



‘family 은유’로 글을 여는 이유는 올해로 20년째 영화 번역을, 그리고 10년째 책 쓰기를 하고 있는 제가 아직은 문장이 아니고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가정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래서 이 ‘family 은유’에 더 애착이 간다는 뜻이기도 하겠습니다. 혼자이다 보니 저는 집보다는 밖에서 일하는 걸 더 좋아합니다. 항상 하나의 단어처럼 혼자 존재해야 하는 집보다는 바깥을 선호하는 제가 즐겨 찾는 곳이 커피숍입니다.



“어수선한 데서 일하려면 산만하지 않나요?” 제 나이 또래는 많이들 그렇게 반응한답니다. 하지만 커피숍에서, 비록 모르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 속에 섞여 일할 때면 마치 제가 문장 안에 속해있는 것 같은 아늑함을 느낍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집중도 잘되고요. “그래도 그렇지, 웃고 떠드는 사람들 속에서 일하노라면 시끄러운 게 거슬릴 텐데요?” 그런 질문도 종종 받습니다. 하지만 커피숍 안의 다채로운 환경에 20년째 익숙해진 까닭도 있겠고, 어쨌거나 일에 몰입하는 순간 참 신기하게도 저의 주변은 자동적으로 스르르 음소거가 돼버립니다.




커피숍은 저에게 일과 놀이와 휴식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복합 문화공간입니다. 오래전부터 디지털 유목민처럼 살아가는 저에게 커피숍은 단연코 커피숍 이상의 매력이 있는 곳입니다. 그것이 도심에 있든, 바닷가나 산간벽지에 있든 커피숍은 서재와 놀이터를 겸할 수 있는 오아시스이니까요. 그곳에서 저는 종이신문 두 부를 읽는 일로 일과를 시작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만끽하곤 합니다. 신문에서 좋은 글감의 아이디어를 얻을 때면 저의 행복지수가 쑥쑥 올라가곤 하지요. 나머지 시간엔 번역을 한다든지, 아니면 책을 읽거나 글을 씁니다.



요즘에 특히 좋아하는 곳은 바다가 손끝에 닿을 듯 가깝게 느껴지는 커피숍입니다. 그런 곳에서라면 재미있는 무비(movie, 舞飛) 안의 세계처럼 흥미진진한 상상이 ‘춤추며 날갯짓하는’ 파도처럼 더 출렁일 것만 같으니까요. 그런 곳이라면 함께 가도 좋겠지만 혼자 가도 제격이겠습니다. 외딴 바닷가 커피숍은 왠지 ‘나 홀로 여행객’에게는 두 팔을 더 활짝 펼치고 반겨줄 것 같은 곳이니까요.


道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뭔가 재미있는 상상을 하면서 큰 걸음으로 활기차게 걷는 모습’을 담은 글자라고 하더군요. 저의 이름 미도의 ‘도’가 ‘道’여서 운명적인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떠나는 걸 좋아합니다. 누구나 경험하듯이 떠나면 떠오르기 마련이니까요. 떠날 때마다 저는 작가 알랭 드 보통의 표현처럼 ‘수줍음을 타는 동물(shy animal)’이 되곤 하지요. 그가 산문집 <공항에서 일주일을>에 소개한 이 동물은 ‘독창적 사고’의 은유입니다. 어지간해선 동굴 밖으로 잘 안 나오려고 버티는 요 녀석도 우리가 어딘가 낯선 곳으로 떠나면 바깥세상이 궁금해지는지 슬그머니 동굴 밖에 나오려 한다지요.





나이가 들어갈수록 시간이 건강만큼이나 소중하다는 생각을 더 많이, 더 자주 하게 됩니다. 무척 자연스러운 현상이겠지요. 경험과 연륜이 쌓여갈수록 일이 더 재미있어지고, 그러다보니 오래오래 일하고 싶은 욕망이 마치 비온 후 죽순 자라듯 커지는 걸 느끼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시간 욕심도 커졌습니다. 불혹의 나이가 거의 끝나갈 무렵까지 저는 주로 집 근처 가까운 커피숍으로만 떠나곤 했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불현듯 궁금해지더군요. “나는 언제까지 일할 수 있는 걸까? 나의 ‘노동의 수명’은 몇 년이나 남은 걸까? 아뿔싸, 얼마 안 남았구나!”, 하고 판단한 저는 노동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로 했고, 결국 찾았답니다. 더 멀리 더 오래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지요.



미국의 시인 존 그린리프 휘티어는 ‘It might have been!’이 인간의 ‘가장 슬픈 말’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아, 그때는 왜 안 해봤을까!’ 혹은 ‘아, 그때 해봤더라면!’이라는 뜻이지요. 우리가 후회를 안 하고 살 순 없겠지만, 시인은 “후회의 사이즈를 줄여보라며, 후회의 횟수를 줄여보라며” 우리에게 귓속말로 속삭이는 것 같지 않은지요? 이제는 할 일이 생기면 그걸 위해 먼 곳의 바닷가 어딘가로 즐겨 떠나곤 하는 저는 더 일찍 그걸 실천하지 못한 걸 이따금 아쉬워하곤 합니다. 자의반 타의반 수많은 유혹에 흔들리면서 시간을 허비하거나 낭비했던 도시와 자주 이별을 하면서 노동의 시간이 더 많아졌으니 결과적으로 저는 날마다 노동의 수명을 연장하고 있는 셈이지요.



무시로 도시를 떠나 자발적인 유배생활을 즐기고 있는 저는 분명 예전보다는 더 시간 부자입니다. 언제든 머뭇거림 없이 일상에서 멀리 떨어진 커피숍으로 홀연히 떠날 수 있는 건, 궁극적으로는 제가 문장이 아니고 단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그런 생각을 해볼라치면 아이러니를 느끼게도 되는군요. 어쨌든 단어인 저는 지금 몇몇 문장이 도란도란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는, 아메리카노 커피향이 그윽한 바닷가 어느 커피숍에 와있답니다. 새 산문집 <아, 그땐 왜 안 해봤을까!>를 탈고하기 위하여…!





이미도 | 작가·외화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