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KBS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동백꽃)이 막을 내렸다. 실로 오랜만에 ‘열심히’ 드라마를 봤다. ‘본방 사수’를 위해 귀갓길에 종종걸음을 친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는데, 이번에 다시 경험했다. 본방을 하고 나서 몇시간 뒤면 케이블TV에서 재방송을 해주고, 동영상 스트리밍서비스인 ‘넷플릭스’에서도 큰 시차 없이 다시 볼 수 있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그만큼 매력적인 드라마였다.
많은 등장인물이 드라마의 인기와 함께 조명을 받았다. 동백이와 함께 여성서사의 한 축을 이룬 향미와 정숙(동백이 엄마)은 드라마의 후반부를 강하게 끌고나갔다. 몇몇 대목에서는 주인공보다도 더 강한 존재감을 보이기도 했다.
kbs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출처 kbs
그러나 내가 눈여겨본 인물은 따로 있었다. 남자주인공 용식이의 엄마인 곽덕순이었다. 드라마 전반부엔 ‘(드라마 속 가상 도시인) 옹산 서열 1위’로 동백이를 든든히 지원해주는 ‘베프’였으나 동백이와 용식이가 연애를 시작하면서는 마음속에 갈등을 겪는 인물이다.
곽덕순은 드라마 속에서 가장 큰어른이다. 나이만 많은 것이 아니라 ‘진짜 어른’이다. <동백꽃> 인터넷 홈페이지에 있는 인물설명을 보면 곽덕순은 ‘카리스마 동네 짱’인데 그 리더십이 지갑에서 나온다. 노상 억척을 떨다가도 골목 사람들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 남몰래 큰돈을 뀌어준다. 그리고 배고픈 놈은 일단 잡아다 뭐든 먹이고 볼 정도로 품이 크다. 동백이도 그렇게 품어주다 ‘베프’가 됐다.
이런 인물설정은 드라마 속에서 충실히 구현됐다. 곽덕순은 옹산 게장골목의 상인회장이면서 해결사다. 온갖 소문이 난무하는 시장 골목 안에서 항상 중심을 잡는 인물이다. 무엇보다 감탄한 것은 드라마가 갈등 국면으로 들어간 뒤에 나온 곽덕순의 ‘자기 객관화’ 능력이었다. 곽덕순은 유복자로 낳아 애지중지 키운 막내아들 용식이 ‘초등학생 애가 딸린 미혼모’ 동백과 연애를 하는 와중에도 초심을 잃지 않는다. 아들의 고생길을 막으려 교제를 반대하면서도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나’를 부끄러워한다. 숱한 드라마의 주인공 엄마와 달리 동백을 미워하지도 않는다. 아들에게도 충분히 생각해보라고 설득할 뿐 모진 말을 내뱉지 못한다.
가장 어른스러운 대목은 동백이의 아들 필구에게 큰 실수를 한 뒤에 나온다. 곽덕순은 필구가 근처에 있는 줄 모르고 동네상인들 앞에서 ‘동백이에게 혹(필구)이 달렸다’는 표현을 쓴다. 이 말을 들은 필구는 큰 상처를 받고 동백이 역시 마음이 무너진다. 곽덕순은 자신의 실수를 인지하는 즉시 필구에게 사과한다. 동백이에게도 사과하고, 동백이 엄마 앞에서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한다. 이후에도 틈나는 대로 필구의 마음을 풀어주려 애쓴다. 결국 드라마 마지막회에서 곽덕순은 다시 필구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하고 활짝 웃는다.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와 있는 어른의 정의다. 한국은 이미 2년 전에 고령사회로 진입했지만, 어디에서든 어른을 찾기는 쉽지 않은 사회가 됐다. 신문이나 방송이 연말연초마다 종교계 어른들을 모시고 연례행사처럼 말씀을 들어 전하던 ‘특집기사’가 드물어진 것도 다른 이유는 없다.
어느날 갑자기 어른들이 모두 사라져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어린 세대들은 더 이상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과거의 경력이 훌륭했다는 이유로 아무에게나 존경을 주지 않는다. 먼저 행동하고,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모습을 보여줘야 존경을 받을 수 있다.
세월이 혼탁할수록 더 많은 어른들이 필요하다. 드라마 속에서나마 훌륭한 어른을 만나 참 반가웠다. 드라마 밖에도 잘 보이지 않을 뿐 곽덕순 같은 어른이 많으리라 믿는다.
<홍진수 문화부>
'TV 블라블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몸으로 말하기]물구나무 서서, 관념의 시선서 자유로워지기 (0) | 2020.07.02 |
---|---|
[정동칼럼]‘펭수’에게 부끄러운 ‘프로듀스’ (0) | 2019.11.11 |
[사설]엠넷의 순위조작 논란, 또 다른 불공정 (0) | 2019.11.07 |
[문화로 내일 만들기]예능 포맷의 한류 (0) | 2019.05.17 |
[공감]트로트가 기가 막혀 (0) | 2019.04.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