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트로트가 기가 막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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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트로트가 기가 막혀

충격적이었다. 오래전 국내 최고 가수들이 기량을 겨루던 <나는 가수다>에서 백지영씨가 나훈아씨의 ‘무시로’를 불렀을 때. 가슴에 총 맞은 느낌. 그때까지 왠지 유들유들한 ‘무시로’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곡을 알게 된 것 같았고, 한동안 참 많이 흥얼거렸다. 조관우씨의 ‘남행열차’도 그랬다. ‘그토록 구슬픈 가사였다니!’ 응원전에서 단체로 몸을 앞뒤로 접어가며 신나게 부르고, 노래방에선 춤까지 추던 것이 미안할 지경이었다. 가요에 대한 짧은 소견을 환기시켜 준 좋은 프로그램이었다.


최근 트로트 스타 발굴을 위한 오디션 프로그램 <미스트롯>이 화제다. 종편 예능 최고 시청률을 연이어 경신하고, 눈에 띄는 참가자들은 유튜브 스타로 등극 중이다. 예상 못한 비주류 돌풍에 다양한 분석도 이어진다. 


새벽시장 같은 질박함 속에서 기막힌 재능을 만나는 게 흥미롭다. 새벽 어스름 속 도착한 시장은 별천지다. 온 세상이 잠든 시간, 나 홀로 바쁘게 산다는 착각이 금세 무색해진다. 어둠을 뚫고 짠내 물씬한 공간에 모여든 수많은 이들 앞에서, 새로운 하루를 살아낸다는 것이 참으로 경건하고 치열한 행위임을 깨닫는다. <미스트롯>에서는 왠지 그러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이미 최고를 인정받은 가수들의 정중한 왕중왕 경합이나 싱그럽지만 설익은 아이돌, 스왝 넘치는 래퍼 경연과는 또 다른 에너지다.


아나운서 김성주가 출연한 TV조선 방송 '미스트롯'의 한 장면


참가자들의 프로필부터 다채롭다. 하이틴, 대학생부터 고된 육아에 꿈을 접었던 엄마들, 이미 알려진 방송인, 현역 가수들도 있다. 유명 가수 이상의 빼어난 재능도 있고,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력, 생계형도 많다. 밤무대나 지방행사 가수라는 편견에서 탈피하고 싶은 절실한 소망도 읽힌다. 성숙하고 넉넉한 품을 가진 이들도 있지만 조급하고 경쟁적인 모습도 보인다. 세련되게 다듬어진 기성 방송인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리얼 삶의 현장’이다. 일명 B급 정서라 불리는 생생한 사연과 특유의 신파성도 뜻밖의 인기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프로의 형식과 깊이에는 아쉬움이 크다. 당락을 결정하는 심사위원들의 대응은 가볍고 즉흥적이며, 전문성이 계속 지적된다. 짙은 화장과 밀착된 의상 위로 휘장을 두르고, 승자에겐 왕관을 선사하는 형식도 시대착오적이다. 종합예능이 대세인 시대라지만, 과도한 노출과 퍼포먼스 위주의 진행은 정작 노래 실력과 음악 본연의 가치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다. 반짝 스타는 탄생하겠지만, 다른 참가자들은 선정적으로 소비되며 시청률에 잠시 일조할 뿐이다.


해방 전후 명곡들의 가사를 새삼 살펴보니 시적이고 아름다우며, 시대정신이 반영된 곡들도 많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가 가진 비애미는 여전히 가슴을 아리게 하고, 박찬욱 감독의 영화 &lt;아가씨&gt;에서 김태리가 불렀던 ‘세기말의 노래’는 희망 없는 미래를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1960년대에 유행했다는 ‘유정천리’는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를 비꼬는 노래로 개사되어 유행했다고도 한다. 트로트는 일제 치하의 수난과 해방, 6·25전쟁의 비극, 굴곡의 근대사를 관통하며 희로애락을 함께해 온 정서적 동지였다. 문학적 향기를 풍기던 음악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점차 단순하고 자극적인 가사들로 바뀌고, 장르의 특성도 희박해지며 비주류화되었다는 역사를 읽는다. 


중요한 것은 시대적 지위에 따라 그에 종사하는 이들까지 가볍게 대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의 인기는 참가자들의 눈물겨운 열정과 진정성이 시청자들의 마음에 닿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느 누리꾼의 말처럼, “죽자고 노래하는 사람들 앞에서 웃자고 심사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댓글 창엔 필요 이상의 성 상품화에 대한 연민과 실망을 표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난주 군부대 공연에서는 노출과 애교를 십분 발휘한 팀들을 제치고, 노래로 승부한 팀이 군인들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심사위원인 장윤정씨는 군부대 공연에 대해 자신도 선입견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했다. 국민들의 수준이 방송을 앞서간다.


<박선화 마음탐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