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들어, 남들은 일부러 짬과 돈을 내어 가고 싶어 하는 바닷가 아름다운 도시에 초대받아 몇차례 다녀왔다. 한 여고의 2학년 학생들과 인문도서를 함께 읽는 시간을 보낸 까닭이다. 강의도 하고 학생들끼리 토론도 하고 발표도 했다. 예상했던 것보다는 잘 읽어왔고, 자기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입시준비로 찌들 시기이건만, 공 들여 책을 읽어오는지라 학생들을 만나면 가슴이 뿌듯했다. 누가 일러준 대로 답을 찾지 않고 스스로 고민하고 함께 토론해 합의점을 찾는 일은 책을 함께 읽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지 않던가.
지난주 학생들과 함께 읽은 책은 김응교 교수가 쓴 <처럼-시로 만나는 윤동주>였다. 이 책을 고른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먼저, 지은이가 섬세한 문학적 감수성과 탄탄한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윤동주 시정신을 빼어나게 분석해서다.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에 들어가지만, 윤동주 시세계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 책으로 윤동주의 시를 잘 알게 되리라 믿었다. 더불어 청소년들이 시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익히는 데도 맞춤하다고 여겼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두 번째는 치밀한 실증적 고증을 바탕으로 윤동주의 삶을 감동적으로 재구성한 점이다. 흔히 윤동주는 기독교적 가치관의 세례만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시만 보아도 그런 분위기가 물씬 풍기지만, 기독교인이 세운 명동마을 출신에 미션학교인 연희전문과 도시샤대 출신이라는 점도 덧붙여 윤동주의 종교성을 쉽게 판단하게 한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 윤동주가 청소년 시절에는 유학의 영향권에 있었다는 점이 잘 드러나 있다.
1899년 2월 회령과 종성에 살던 문병규, 김약연, 남도천, 김하규가 솔가하여 명동마을을 세운다. 김약연은 맹자의 대가였으며, 남도천은 김약연의 스승이었고, 김하규는 주역에 정통했다. 이들이 집을 세운 다음에 한 일이 서당을 짓는 일이었다. 김약연은 윤동주의 외삼촌이기도 한데, 그에게서 한학과 맹자를 배웠다. 김약연은 훗날 평양신학교를 나와 목사가 되어 명동에서 목회활동과 독립운동을 병행했다. 흔히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명동마을이 기독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나중 일이었던 셈이다.
이런 전기적 사실이 중요한 건 대표작 ‘서시’의 새로운 이해를 돕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맹자 사유에 기대 ‘서시’를 분석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은 맹자의 앙불괴어천(仰不愧於天)을 인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부끄러움은 맹자가 말한 사단의 수오지심인 바, 윤동주의 인생관이라 할 법하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는 측은지심의 시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미 윤동주는 ‘해바라기 얼굴’ ‘슬픈 족속’ ‘병원’ ‘투르게네프의 언덕’ 등에서 남의 불행을 못 본 척하지 못하는 마음을 시적 언어로 드러냈다.
윤동주가 맹자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이 책을 고른 세 번째 이유와 맞닿아 있다. 영화 <동주>를 보면 윤동주는 송몽규의 그림자인 양 나온다. 기실 문명(文名)을 먼저 떨친 이도 송몽규요, 청소년 시절 독립운동을 위해 김구를 찾아간 용맹성을 보인 것도 송몽규요, 교토대학에 들어가 교토에 먼저 자리 잡은 것도 송몽규다. 이 점에 착안하면 영화 <동주>의 윤동주 해석에 무리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윤동주의 판결문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달리 해석할 수 있다. 윤동주가 일제의 징병제를 무력 봉기에 역으로 활용하자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스승이자 외삼촌인 김약연이 일찌감치 무장투쟁을 주창했다는 점, 송몽규의 판결문에도 같은 죄목이 있다는 점을 참작하면 이 역시 윤동주가 주도하지 않고 동의하는 정도에 그쳤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지은이의 말대로, 윤동주가 이 혐의를 재판정에서 당당하게 인정했다는 점은 단순한 동의 수준을 넘어섰다는 뜻이다.
단순 동의냐, 적극 참여냐 해명하는 데 윤동주가 맹자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의미 있는 실마리가 된다. 지은이도 지적했듯 윤동주의 부끄러움은 맹자가 강조한 반구저기(反求諸己)의 정신이다. 그 모든 것의 허물을 나에게서 찾는 성찰이야말로 수오지심의 출발점이다. 그런데 맹자는 수(羞), 나의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데 그치라 하지 않았다. 오(惡), 정의롭지 못한 세상을 증오하는 데로 나아가라고 했다. 반구저기하면 호연지기를 발휘하여 추기급인(推己及人)해야 마땅하다. ‘서시’를 맹자에 빗대어 보면 반구저기하여, 측은지심에 이르러, 마침내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추기급인의 정신을 선언한 셈이 된다. 맹자의 정신에 따르면, 윤동주는 소극적인 독립운동을 할 리가 없다. 송몽규의 그늘에 있던 것이 아니라, 윤동주는 그가 쓴 시처럼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윤동주는 우리 시사에서 드물게 자신이 쓴 시처럼 살다간 시인이다. 이 책을 함께 읽은 학생들이 이 대목까지 알아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번 책은 학생들이 부분을 나누어 발표하면서 윤동주 시세계에 바짝 다가갔다. 한 조씩 발표가 끝나면 그 부분에 나온 윤동주의 시를 한 편씩 낭송해보라 했다. 학생들은 발표할 때보다 더 즐겁게 윤동주의 시를 낭송했다. 문득,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강고한 학벌체제 안에서 성과를 보이라고 아이들을 몰아세운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공부가 아님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래서는 안된다며 도리질을 쳤다. 윤동주의 시를 소리 내 읽고 그 뜻을 새기며, 그의 삶을 곱씹는 게 진짜 공부가 아닐까. 학생들이 자라고 있는 이 도시의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그럴 수 있다면 더 좋겠고. 수업을 마치며 여러분이 윤동주의 시‘처럼’ 성장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 진심이 부디 전해졌으면 좋겠다.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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