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발표 때부터 화제가 되었던 이철승의 <불평등의 세대>를 읽으며 마음이 착잡했다.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이끈 ‘386세대’가 이제 강고한 기득권의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다음 세대의 미래를 가로막는다는 분석에 대체로 동의할 수밖에 없어서다. 특히 지은이가 던진 질문은 등골이 서늘한 긴장을 느끼며 곱씹어 보았다. 지은이는 물었다. 386세대가 노동시장에서 고통받는 청년세대와 여성, 그리고 비정규직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맞서 싸웠던 산업화 세대와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민주주의가 터 잡았는데 왜 우리 사회는 더 잔인한 계층화와 착취의 기제를 발달시켰는가, 라고.
386세대는 반체제 지식인과 민중세력의 결집으로 권위적인 정치권력을 무너뜨렸다. 민주화 이후 386세대는 대거 직업정치인이나 전문관료로 변신했다. 지은이는 이를 ‘시민사회의 국가화’라 했다. ‘1987년 체제’라는 말은 386세대가 이룬 역사적 성과의 한 상징이다. 운도 따랐다. 1997년에 몰아닥친 외환위기는 386세대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위기를 이겨내려고 자본은 구조조정의 칼을 뺐다. 윗세대가 경제영역에서 강제퇴역 당하고, 다음 세대는 아예 진입이 막혔다. 정보화 시대는 완전한 세대교체를 이루는 결정타였다. 정치와 경제, 시민사회를 장악한 386세대는 ‘이익 네트워크’를 이뤄내며 우리 사회의 확실한 지배그룹이 되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386세대가 맞이한 화양연화의 시대는 찬란하나니, “다른 세대를 압도하는 고위직 장악률과 상층 노동시장 점유율, 최장의 근속연수, 최고 수준의 임금과 소득점유율, 꺾일 줄 모르는 최고의 소득상승률, 세대 간 최고의 소득격차”, 참으로 다 이루었도다! 라고 감탄할 만하다. 그런데 지은이가 또 물었다. ‘신분제 사회를 만들어 놓고 내 자식이 신분제 사회의 상층에 오를 확률을 높이는 전략과, 신분제 사회를 해체하고 내 자식과 다른 자식들이 자유로운 개인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사회적 위험을 분담하며, 노동의 대가를 적절히 공유하는 사회를 만드는 전략 중 어느 쪽이 현명한가?”라고.
아무리 386세대가 득세한다고 하더라도 신분제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항변할 수 있을 터다. <불평등의 세대>는 이 표현이 얼마나 적절한지를 밝히기 위해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산업화 세대는 주로 1930년대생이다. 이들은 벼농사 문화에서 비롯한 신분제와 위계문화가 몸에 배었다. 그러다보니, 산업화 세대는 교육과 자산 투자를 통해 과거의 신분제적 위계를 재생산하거나 극복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산업화 세대의 불평등은 대물림되었다. 오늘의 노동 지위를 분석하는 틀로 지은이는 결합노동시장이라는 개념을 내세웠다. 고용형태가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지, 일터가 대기업인지 중소기업인지, 작업장에 노조가 있는지 없는지 하는 세 가지 기준을 내세웠다. 이 기준에서 두 개 이상을 충족하면 노동시장에서 상층을 차지한다. 예를 들어 대기업-정규직-유노조의 조건에 들면 상층으로 전체 임금노동자의 20%가량이다. 대기업-비정규직-무노조는 중층으로 약 30%다. 중소기업-비정규직-무노조는 하층으로 50%를 차지한다. 이 결합노동시장 지위가 중요한 것은 한 지위에 들어서 줄곧 그 상태를 유지하면 신분계급화의 초기 단계라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부모세대의 노동시장 지위가 자식세대에게도 이어진다면 이를 세습화라 할 수 있다. 지은이는 여러 지표로 새로운 의미의 신분제 사회가 닥쳤음을 입증했다.
이제 지은이의 질문에 답변해야 한다. 386세대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난리냐는 항변은 통하지 않는다. 자유와 평등의 세상을 만들어보겠다고 젊은날을 희생한 세대다. 그런데 자본의 자유는 실현되었을지언정 일하는 사람의 평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시, 나서야 한다. 이 예기치 못한 지옥도를 다시 바로잡아야 한다. 젊은날 목청껏 외쳤던 평등의 가치가 오롯이 실현되도록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 지은이는 그 방법으로 “한국사회에 대한 386세대의 두 번째 희생”을 촉구했다. 노동시장에서 가장 불리한 자리에 놓인 다음 세대에게 최대의 기회를 보장하려면 386세대의 양보를 전제로 몇 가지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말이다. 임금 삭감, 임금피크제, 연금 혜택 축소로 마련한 돈으로 청년고용을 확대하자고 한다. 지금의 연공제는 불황일 때 기업이 비정규직을 늘리고 고용을 동결하는 핑계가 되니 직무제로 전환해야 한단다. 그리고 증여나 상속에 따른 세금을 엄격히 집행해 그 일부를 청년세대 주거권 보장을 위해 사용하도록 법제화하는 방안도 내놓았다.
청년세대를 위한 복지국가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대안도 제시했다. (재)훈련 시스템을 도입하고, 국가가 관리하는 취업 및 창업 알선기관을 확장해야 한단다. 당연한 말이지만 비정규직 위주의 유연화를 지양하잔다. 사회안전망을 확충하자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하여 “도발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진 담대한 젊은이가 성장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보자고 호소한다. 지은이는 이 대안을 ‘사회적 자유주의’라 이름 붙였다. 고삐 풀린 자본의 횡포로 약해질 대로 약해진 사회와 공동체를 되살리기 위해 국가의 힘을 빌리자는 뜻을 담았다.
책을 덮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나를 포함한 386세대는 과연 희생의 길을 택할까? 도리질만 했다. 지은이도 말했지만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은 경우는 드물다”. 거기다 지은이의 대안은 자본계급의 양보가 포함되지 않았다. 일방적 양보를 택할 세대는 없다. 내가 보건대 세대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법은 역시 지은이도 말했지만, 다음 세대가 “386세대를 통한 대리정치를 끝내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는 데 있다. 청년세대가 정치세력화해 386세대를 압박해야 한다. 자기 세대에게 주어진 소명을 명예롭게 마치고 퇴장할 것인지, 아니면 다음 세대에게 추방당할 것인지 택일하라고 말이다.
<이권우 |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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